남북교역사건(일명 북어사건)의 이면 김석원 장군 이야기

 


38도선이 가로막히면서 남농북공(南農北工)의 산업구조는 한반도의 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고 갔다. 남한은 한반도의 쌀 총생산량의 76%에 이르나 150만 명의 월남자들을 수용하게 된 데다 흉작이 겹쳐 식량은 태부족했으며 북한은 소련군이 들어와 공장을 뜯어가면서 쌀까지 실어가 버려 남북의 식량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6년 2월 미소 공동위원회의 발표를 계기로 남북교역이 이루어졌으며 이 교역은 1949년 3월 31일까지 계속되었다.


남북교역 장소는 38도선 일대(일부 해안 포함)에 약 56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교역방법을 보면 북한 측은 조선교역이란 통제기구를 만들어 놓고 일사불란하게 물품을 통제하는데 반하여 남한 측은 제각기 상사(商社)에서 물품이 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에다 북한은 남한에서 활동 중인 공산당의 공작금을 보내기 위해서도 그렇거니와 남침 준비를 위한 첩보 수집을 위해 조선교역에 종사하는 자들을 첩보원으로 메웠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남한에서는 무질서한 교역을 통제하기 위해 육군본부에서 상인들에게 교역증을 발급했으나 그 실효는 거두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개별적으로 하는 보따리장수가 더욱 판을 쳤기 때문이다.


교역물을 보면 남한에서는 주로 의약품, 전기제품(전구 등), 생고무, 면직물, 타이어와 자동차 부속품, 재봉틀 등이었는데 북한에서는 명태, 북어, 오징어, 카바이트, 인삼 등 거의가 식료품이었으며 흥남에서 생산되는 비료나 농기구 등은 보내지도 않았다. 여기에 보따리장수들은 부피가 작고 값나가는 다이아징, 페니실린, 담배 등 인기품목을 북쪽으로 져 날랐다.


필자가 당시 남북교역의 중추를 이루었던 유정리(양문리 북쪽 1킬로미터 지점으로 당시는 북한 측의 물품 집적지)에 살며 교역상황을 직접 지켜보았던 이정식을 만나 그 실태를 알아보았다. 그는 전쟁 전에 월남하여 방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군대생활을 했기에 이 증언은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살던 유정리에 북한에서는 강원기업사를 만들어 민간인으로 운영했다. 북한에서는 명란젓, 동태, 북어를 주민들이 이고 지고하여 38도선을 넘어 성동 2리 벌판에 갖다 놓으면 남한에서는 우마차에 군복기지(옷감), 군화(워커), 짚차 부품, 총기류가 올라왔다. 이때 나는 북한 측 사람이었지만 ‘저럴 수가 있을까’하고 남한이 크게 잘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강원기업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북한의 첩자였는데 내가 월남하고 나서 얼마 후(6.25 전) 그들 전원이 북한 물건을 몽땅 가지고 월남해 귀순하였다.”


즉 남한에서는 전략물자가 올라가는 대신에 북한에서는 당시의 말로 ‘술 안주감’이 내려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주민이나 장병들은 불만과 걱정이 대단하였다.


바로 이 무렵(1948년 11월) 개성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제 1사단장으로 부임한 김석원은 남북교역의 실태를 면밀히 조사한 후 대통령에게 부당성을 직소하여 정부에서는 1949년 3월 31일자로 남북교역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정보획득이란 명목으로 군고위층의 친지들이 개입하여 교역이 성행되고 있었다.


마침내 김석원은 이 대통령에 건의하여 ‘단속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9년 4월 북한에서 토성으로 넘어오는 북어 20 여 트럭분과 비단 500 여 만원어치를 압수했다.


이 후에 채병덕과 김석원 사이에 벌어진 사태를 후일 김석원의 <노병의 한>에서 옮겨본다.


“나는 압수한 물품을 사단 정보참모, 군수참모, 부관참모(당시는 고급부관), 헌병참모 입회  하에 이를 처분하여 송악산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병사들에게 부식으로 일부를 충당하고 나머지는 음료수, 과일, 과자를 사서 지급했다. 또한 전투 때 탄약을 운반한 주민 400 여명에게 보상으로 지급했으며 나의 밥상에는 ‘북어 꼬리 하나 올려놓지 말라’고 엄명해 놓고 있었다. 얼마 후 안 일이지만 하주는 육본 고위 장성의 조카였다. 또 어떤 K국장은 하주가 자기 아버지라고 압력을 가해 오기도 했으나 나는 ‘내 아버지라도 못 풀어주겠다’고 버텼더니 마지막으로 진상조사라고 하면서 1개월이나 사단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부정은커녕 북어 대가리 하나 먹은 사실이 없음이 밝혀졌다. 나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총참모장과 함께 두 번씩이나 이 대통령에게 불려가 그때마다 관계자의 엄단을 주장했다가 나와 채가 군복을 벗게 되었다....... 마음대로 압수해서 처분한 나의 행위는 법치국가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당시의 정치풍토가 이런 부패자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한 것이 6.25를 막지 못한 약한 군대가 되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게 되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것은 정당한 명령에 한한다. 만일 상관이 ‘항복하자’ ‘도둑질 하자’고 한 명령까지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김석원도 “법치국가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었겠지만”하고 술회하여 행위 자체의 잘못은 시인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한편 채병덕도 대통령 앞에 섰을 때 “육군본부의 체면손상이 문제였지 선배로서는 존경합니다.”고 김석원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채병덕이 과연 부정에 개입했느냐의 여부가 문제인데 당시의 1사단 예하 지휘관 및 참모 그리고 육본의 고위 장성들은 그의 결백을 증언하고 있으며 모든 자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김석원에게 분노를 참지 못하게 한 것은 일부 국장급의 친척들이 개입(<노병의 한>에서는 K국장의 아버지라고 쓰고 있어서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한 사실이었다.


일본군 출신이란 죄책감 때문에 군에 들어오는 것조차 미루고 근신했던 그가 ‘독립된 한국군을 위해’ 여생을 바치려 한 마당에 이런 망동을 보고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설에는 양자 간의 이간을 도모한 3자의 모략이라고도 하나 그들의 경륜으로나 모든 것을 볼 때 자기 판단이 흐려 타의에 의하였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허와 실> 안용현 p129-131



물자를 압수당한 화주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반발하여 각계 요로에 진정을 하는가 하면 채병덕 총장에게는 군부의 처사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리고 김석원 사단장이 물자를 임의처분하면서 착복한 혐의가 있다고 모해하였다.


채병덕 총장은 전봉덕 헌병사령관에게“헌병사령부에서 철저히 조사하라. 만일 김석원 사단장에게 부정혐의가 드러나면 가차 없이 구속해 버려라”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헌병사령관은 진상조사에 나섰다.


이런 정황에서 1사단 헌병대장 이풍우 소령이 김석원 사단장의 심복이라 해서 해임되고 이익흥 소령이 그 후임으로 보임되었다. 수사요원들은 김석원 사단장의 명륜동 집과 성남중학교 주변에까지 배치되었다.


그러나 헌병사령관은 김석원 사단장에게 부정착복의 혐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구속불가”라고 복명하였다.


김석원 사단장은 그 자신이 착복혐의를 받아 ‘정보원에 의해 뒷조사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반발하여 명태처리에 대해 세밀히 보고함과 아울러 태도를 더욱 굳혔다고 한다.

<6.25전쟁과 채병덕장군> p102-117



업자는 육군본부에서 발급하는 교역증을 수급하는데 혈안이 되었으며 이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막대한 이익이 저절로 굴러들어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채병덕 참모총장과 김석원 준장을 예비역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명태사건은 더 이상 정치문제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으나 흑백은 밝혀지지 않은 채 끝났다. 그러므로 배후에 무엇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경향이 없지도 않다.


김석원 장군은 이른바 고전적인 무사다운 풍격을 갖는 군인으로 협조성이 부족하다던가, 융통성이 없다는 중평이다. 전쟁이 시작되어 사단장으로 재임명된 후에도 이러한 결점 때문에 오래 꽃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잘못된 사람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너무나도 정의감과 독자성이 강하여 연합작전하는데 걸맞지 않은 성격이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이 건에 대하여 이응준 장군은 “그것은 김석원의 고집과 완고함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채병덕은 수뢰할 수 있는 사나이가 아니다. 법적으로 볼 때 채병덕의 명분이 옳다. 그러나 김석원은 한번 마음먹으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하는 성격이므로.......”라고 웃으면서 말해주었다.


채병덕 총장의 결백을 믿고 있는 사람은 많다. 총장 보좌관인 이상국 장군은 “나는 채총장의 부엌까지 알고 있는데 그는 그야말로 돈이 없었다. 만일 그가 부정을 저질렀다면 부덕(婦德)이 고매한 백경화 부인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고 집안 살림이 그처럼 쪼들리지 않았을 것이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는 지금은 밝힐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정이 숨어있는 것 같다. 이 결과를 어떤 장군은 “이것은 일본육사출신의 단결에 쐐기를 박으려는 타 계열의 모략으로 문제가 커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예편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했다. 사람 좋은 두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라고 그 이면이 있다는 듯 말해 주었다. 

<한국전비사 상권> p480-489  중요부분만 요약한 것이어서 문맥이 맞지 않음.




이 남북교역사건은 단순히 채병덕 육참총장과 김석원 1사단장의 대립이 아니다. 실제로는 육본 고위간부로 있으면서 '하주가 내 조카요', '내 아버지요' 한 자들이 당시 한국군 내부의 부패의 주범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 사건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못하게 되자 김석원 장군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계속 군 요직에 있으면서 국민방위군 사건이나 김창룡 특무대장 저격사건에도 관련하게 된다.


우리 사단장 각하를 위해서라면 김석원 장군 이야기

 

송악산에서 중대장 생활을 하던 49년 5월 4일, 드디어 북한공산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날 북이 불법으로 38선 약간 남쪽으로 침입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자 그들을 쫓아내려 우리가 공격하여 38선을 탈환하였고 그들이 다시 공격하는 등 피아간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전투는 박격포와 대전차포까지 동원한 대규모의 전투로 확대되었으며 때로는 일시 소강상태, 때로는 대규모 공방전으로 7월 말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난 이곳에서도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게 된다. 이 전투에서 공산군은 120밀리 중박격포와 122밀리 포 등을 사용했는데 화력이 우리보다 월등하게 우세하였다. 38선 상의 비둘기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우리 중대가 공격할 때였다. 두 개의 선두 공격 소대와 중간선두에서 공격 제대와 같이 적진에 돌입하던 나는 적탄을 맞고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틀림없이 적탄을 맞고 충격으로 쓰러졌는데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왼쪽 가슴이 뜨끔하여 들여다보고 나는 놀랐다. 미군 작업복 왼쪽 윗 포켓에 달려있는 두껍고 커다란 철제 단추가 쭈그러져 있는 게 아닌가.

적의 따발총탄에 맞았는데 정면으로 맞은 것이 아니고 약간 우측면으로 날아와서 맞았기 때문에 단추만 쭈그러지면서 총탄은 왼쪽으로 비켜 빠진 것이다.


그리고 난 이곳에서 지휘자의 태도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구한 목숨만큼이나 값진 교훈을. 그날은 우리가 비둘기 고지를 점령하던 날이었다. 겨우 5백 미터 정도의 거리를 서로 밀고 당기는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난 비둘기고지를 다시 빼앗았다는 통쾌함을 억누르며 최경록 연대장께 무전으로 보고를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날아온 무전은 전혀 예상 밖. 아직 총탄이 머리 위를 난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단장 김석원 대령이 고지 순찰을 하러 이곳으로 벌써 떠났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난 소대장에게 고지를 맡기곤 쏜살같이 내려갔다. 산 밑엔 벌써 김 사단장이 오고 있었다.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카이젤 수염을 만지며 뒤엔 일본도를 든 부관을 거느린 채 차에서 내려 고지로 올라오고 있었다.


“각하, 올라오시면 위험합니다. 아직도 적이 치열한 사격을 해오고 있습니다!” 당시 사단장은 계급이 대령이어도 각하란 칭호를 붙이던 시절. 난 거수경례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하나 날 처음 보는 그는 내 말엔 아랑곳 않는다. “음, 자네 이름이 뭔가?” “네, 대위 채명신입니다.” “그래 비둘기 고지를 탈환했다고. 잘 했다. 정말 잘 했어. 나 거기 한번 올라가 보자.”


“아니, 각하. 올라오시면 위험합니다. 아직도 적탄이.......” 그러나 나는 내 말을 채 맺을 수 없었다. 그가 내 말을 끊은 탓이다. “괜찮아, 나 김석원이야.”


아무튼 그는 막무가내로 결국 고지 정상까지 올랐다. 그동안에도 적의 포탄은 계속 우리 측에 낙하하고 있었다. “흠,  놈들 포가 참 많구나.” “예, 화력에선 우리보다 월등합니다.” “ 그런데도 이 고지를 빼앗은 걸 보면 정말 장하고 기쁘다.“ ”그래선데 각하, 지금 보시다시피 적이 쫓겨 도망가고 있는데 38선을 넘어 추격섬멸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십시오.“


사실 그날 우리의 기세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적은 후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장의 말은 단호했다. “자네들의 용기와 심정은 이해하지만 38선 월경은 안 돼.“그렇지만 저놈들이 먼저 쳐들어 왔는데 우리라고 추격해서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아무튼 사람이 38선을 넘는 건 안 돼. 총탄이나 포탄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거부하는 그의 얼굴은 썩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때 그에게서 감명을 받았다. 최고지휘관이 적탄이 난무하는 최전방을 방문, 사병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일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부하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날 사병들의 눈빛에서 읽은 것이다.


굳이 따진다면 김 사단장의 작전이나 전술은 구식이었다. 그는 무전기보단 큰 소리로 호령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지휘자였으며 일본도를 옆구리에 차야만 군인답다고 생각하는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용감성과 부하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결코 구식이랄 수 없었다. 전투 중 그는 항상 위험한 최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진작시켰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게다가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항상 육군병원에 들려 부상병들을 어루만져 주는 자상한 상관이었다. 그는 부상병들을 위해 손수 담배와 건빵을 들고 다니며 상처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중대원도 5,6명 병원에 후송돼 치료를 받았는데 그들의 소감은 한결 같았다. “난 우리 사단장 각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 이는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었다. 사단장이란 한 인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었다.

<채명신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p71-74





중공군을 허탈케 한 현리 전투 3군단의 도주 한국전쟁

 

20군의 60사단은 17일 03에 후평리 오마치, 미산리, 왕성곡 일대를 점령, 적군 5백여명을 섬멸하고 현리 지역 국군 3, 9사단의 철수로를 차단하였다.


27군의 우회 임무부대인 81사단은 17일 05시에 엄달동 도로 양측 고지와 침교, 방내리 요지를 점거하여 현리의 적이 서남으로 도주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중공군의 한국전쟁사> 세경사 p149


현리 3군단의 목줄인 오마치 고개는 5월 17일 07:30에 선두부대인 중공군 20군의 선두부대인 60사단 178연대 2대대 6중대 병력이 점령하였으나 08시경에는 2개 중대로 증강되고 오전 중으로는 대대 규모, 오후에는 연대 규모, 야간에는 60사단의 전 병력이 배치되었다.


오마치 후방 5킬로미터 지점의 침교 일대에도 5월 17일 오후까지 중공군 27군 81사단이 점령함으로써 국군3군단은 중공군의 2중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6.25전쟁의 실패 사례와 교훈> 최용호 p357-359


위 자료에서 보듯이 오마치 남쪽 5킬로미터 지점인 침교 일대도 17일에 이미 중공군이 점거하여 3군단의 퇴로를 이중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만약 3군단이 오마치 돌파를 시도했다면 중공군은 3군단 주력에 적당한 피해를 주며 돌파를 허용하였을 것이고 다시 침교에서 차단하고 오마치를 봉쇄한 채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3군단은 군우리 남쪽 계곡에서 미 2사단이 당했던 것과 같은 최악의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중공군으로서는 당연히 3군단이 오마치 돌파작전을 시도하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국군을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3군단은 오마치 돌파를 시도해보지도 않고 방태산 방향으로 도주했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3군단의 병력을 그 정도(70%)나마 건질 수 있었던 천운이었다.


아래 기록은 국군 5,7사단과 3군단을 다 섬멸하려던 중공군의 허탈감을 엿보게 하는 글이다.


종군기자 화산의 일기 1951년 5월 20일


동부전선 지역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저께 접수한 전문에는 ‘적 5개 사단을 포위했으며 완전히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보내온 전문에는 ‘4개 사단을 포위했는데 2개 사단은 이미 도주하고 나머지 2개 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전화로 확인한 결과는 전혀 상상 밖이었다. “적은 이미 모두 도주했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도합 적 5천명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사상자가 3천명이고 나머지 2천 명이 포로입니다”

<아, 압록강 黑雨> 葉雨蒙 p178


아래 표는 중공군의 국군 및 유엔군 포로 획득 현황으로 51년 4월과 5월 사창리 패전과 현리 패전이 포함된 중공군 5차 공세의 국군 포로 획득 수가 다른 공세 때에 비하여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1950.10.25-1953.7.27                   항미원조전사 부록 3의 표 1,2,3


 

1950

11.7

1950

12.24

1951

1.8

1951

4.21

1951

6.10

1951

11.30

1952

3.31

1952

11.30

1953

4.30

1953

7.27

 합계

주요

전투

1차공세초산,

온정리,운산

6사단

2차공세영원,덕천,군우리

7,8사단

미2사단

3차공세

1.4후퇴

4차공세
2차반격

횡성,

지평리

8사단


5차공세

사창리,현리

6사단

3,9사단

 

 

 

 

 

6차공세

금성

 

수도,6,

8,3사단

 

한국군

 4,741

 5,568

 5,967

 7,769

 5,233

   652

   834

   919

   555

 5,577

37,815

유엔군

   527

 3,523

   367

 1,216

 2,073

   334

   124

   160

   134

   250

 8,708

 합계

 5,268

 9,091

 6,334

 8,985

 7,306

   986

   958

 1,079

   689

 5,827

46,523





국군의 창군 자원 한국전쟁

 

한국군은 창군시 다수의 일본군 출신과 소수의 만주군 출신, 독립군계열(구 독립군, 광복군)출신으로 이루어졌다.


해방직전 군사경력을 가진 각 출신별 인원을 보면 일본육사출신(26기 이후)이 85명 정도, 학도지원병출신이 4358명, 육군특별지원병출신이 17664명, 해군특별지원병출신이 3000명, 육군징병출신이 186980명, 해군징병출신이 22290명이었고 만주군 출신이 장교 하사관 도합120명가량, 광복군출신이 8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창군의 인적자원을 개인별로가 아니라 출신별로 그 성분을 포함하여 자질의 장단점을 대체적으로 평가해 본다면 우선 일본군출신은 현대적 전술전기를 어느 정도 터득했다는 점에서 강점이 있었던 반면 보호와 원조의 미명하에 나라를 통째로 삼킨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봉사했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러기에 신생조국에 건군의 역군이 되기를 자처하고 나선 경우가 있는가하면 근신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육사 출신의 경우는 군국주의 이념을 빼놓고는 국가의 간성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며 지원병출신은 전제형 군대의 부산물인 구타행위와 학력 등 자질면에서 다소의 결함은 있었지만 현대전을 경험한 역전의 용사들로서 특히 소부대의 육성에 필수적인 존재였다.


학도병 출신은 강제로 입대한 경우가 많았고 1944년 5월 이후 광복군으로 이탈하여 참여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군출신의 약점인 남의 나라를 위해 복무했다는 비난의 소지를 면할 수 있었으나 군사적 자질이 부족했다. 그러나 전문대 이상의 학력과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미군교리의 조기보급)을 인정받아 발탁되었지만 학병동맹과 학병단의 대결에서 볼 수 있었듯이 가치관이 분열되어 있었다.


만주군 출신의 경우 군사적 자질면에서 일본군출신에는 뒤지지만 광복군 출신보다는 우월한 반면 일본의 괴뢰 만주국 국방군에서 복무했다는 약점이 있었다.

일본육사에 편입되어 유학한 경우는 기성장교와 군관학교 생도들 중에서 선발된 준재들로 자질면에서 볼 때 일본육사출신과 비교하여 추호의 손색도 없지만 봉천, 신경군관학교출신들은 군사적 자질은 갖추었으나 경험의 부족과 당시 만주라는 특수한 환경적 여건으로 인해 일부 요원이 불순사상을 포지함으로써 중도에서 탈락되는 자가 나오기도 했다.


광복군 출신의 경우 현대전 수행을 위한 군사적 자질면에서 일본군 출신에 뒤지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쟁했던 법통성을 지녔고 독립투쟁을 하면서 반공의식이 투철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립투사들이 그러했듯이 이들도 가정을 돌보1지 못하고 정상적인 교육도 받지 못하는 가운데 나이만 먹게 되어 당시 미군정이 요구하는 자질(군사경험, 영어구사능력)에 합당하는 자가 적었다.


한편 창군을 우리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미군정의 주도로 하게 되었고 미군사고문관이 우리 경비대를 비이념적으로 육성코자 했으며 군사기술자(technocrat)를 중시했기 때문에 일본군출신과 만주군 출신이 빛을 보게 되고 광복군은 법통성 주장과 결부되어 빛을 잃게 되었다.

 

즉 일본군 출신의 경우 육사 출신과 지원병 출신은 군사기술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만주군 출신은 만주군 복무시 일본군사고문단의 고문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고문관제도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여 미군과 호흡이 일치되었고 따라서 소수이지만 다수의 일본군에 뒤지지 않았으며 이에 반해 일본육사출신들은 지휘권에 집착한 나머지 고문관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있어 미움을 사기도 했다.

참고자료   <창군>



현리 전투 3군단 붕괴의 시발 한국전쟁


 


30연대장 손희선 대령은 사단장으로부터 “용포 서쪽에 있는 내린천 북방 고지를 점령하여 군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구두명령을 하달하였다.


제 3대대는 736고지를 확보하여 군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라.

제 1대대는 제 3대대를 후속하여 785고지를 확보하고 군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라.

제 2대대는 연대 예비로 매화동에서 집결대기하라.


30연대장은 이 명령을 하달할 때 공격개시선과 공격개시시간을 명시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단장으로부터 군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언명하였으므로 각 대대장들은 그들이 포위망 돌파작전의 일환으로 목표를 공격하게 된 사실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연대의 선두부대로 지명된 30연대 3대대장 김진동 중령은 현리에서 용포로 이동하여 일몰 직전(1930)에 공격개시선 전방의 사평동에 일단 대대병력을 집결시켰다. 이곳에서 대대장은 각 중대에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하였다.


제 10중대는 736고지를 점령 확보하라.

제 11중대는 736고지 우측방을 점령 확보하라.

제 9중대는 562고지를 점령 확보하라.


이때 대대장은 적정이 불확실한 상황하에서 목표를 점령해야 하므로 그가 가장 신임하고 있던 10중대장 조규호 소위로 하여금 736고지를 점령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10중대의 진출상황을 보아 가면서 11중대를 투입하기로 작정하였다.


대대장이 내린천 건너편의 방대산 쪽 고지에 9중대를 배치한 것은 군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는 주임무도 중요하지만 적정이 불투명한 상황 하에서는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과 만약 방대산으로 철수하게 될 경우 퇴로가 차단당하는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고 아울러 대대주력의 철수엄호를 고려한 용의주도한 조치였다.


10중대는 해가 질 무렵에 중대대형으로 736고지로 진출하기 시작해 2100경 고지정상을 점령하고 접적이 없는 가운데 병력을 배치완료하였다.


11중대는 10중대의 뒤를 이어 지정된 목표를 점령하였고 대대수색대는 새터 부근에서 우측에 배치된 제 29연대 수색중대와 연결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3대대가 736고지를 점령완료한 시간은 2200 경이었다. 3대대의 목표점령상황은 무선으로 연대에 보고되었다. 이때에는 현리 일대에 2개 사단이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선망의 혼선이 심하여 통화가 매우 어려웠다.


3대대의 뒤를 이어 736고지의 남서쪽에 있는 785고지를 점령할 임무를 띤 1대대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용포 교량을 건너지 않고 내린천을 따라 남하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30연대 전술지휘소에서는 어둠이 깔린 이후부터는 1대대와의 통신마저 두절된 관계로 1대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 뒤에 확인된 일이지만 이 시각에 1대대는 방대산 중턱으로 철수하고 있었으나 그 사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1대대가 785고지를 점령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30연대장 손희선 대령과 1대대장 김상의 중령의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1대대장은 군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방대산에 병력을 배치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30연대장은 지금까지도 1대대장이 785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제 18연대장 유양수 대령은 그에게 부여된 포위망 돌파임무의 중요성과 이를 수행하는데 수많은 난관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비장한 각오 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연대는 2100에 9사단 30연대가 공격을 개시하면 이 연대를 후속하다가 오마치(오미재) 부근에서 30연대를 초월공격하여 오마치를 점령한다.

제 2대대는 도로를 기준으로 하여 오마치 우반부를 점령하라.

제 3대대는 도로를 기준하여 오마치 좌반부를 점령하라.

제 1대대는 연대 예비로 공격준비태세를 갖추고 공격제대를 후속하라.

각 부대는 야간전투에 필요한 무장만을 갖추어 작전에 임하라.


이와 같이 18연대의 작전명령은 30연대와는 달리 포위망 돌파를 위한 적극적인 것이었으며 이에는 필승을 다짐하는 연대장의 의지가 스며있었다. 연대장은 명령을 하달하고 용포 부근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한 후 공격 준비 상태를 점검하면서 30연대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에 9사단장이 18연대 전술지휘소를 방문하여 연대장에게 “돌파작전에 자신이 있느냐?”고 질문하였다. 이때 18연대장은 9사단장이 돌파작전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9사단장은 용포 주변의 교전 상황으로 보아 야간 공격으로 10 Km의 목표지대를 탈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상황추이를 확인하면서 대응책을 강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방태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사단장을 수행하였던 군수참모 김재춘 중령은 후일에 “주변에서 소총 소리가 들리니까 사단장이 부대 지휘를 포기하고 방태산으로 올라갔다. 그 때 최석 준장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증언하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현리-용포 일대에 밀집한 군단병력은 점차 혼란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29연대가 현리 주변에 배치되면서부터 여기저기서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집결지에 모여 있던 병력들에게는 사격 소리만 들릴 뿐 돌파공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런 정황 속에서 어느 부대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일부병력은 나름대로 살 길을 찾아 방대산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오마치-현리 도로상에 세워져 있던 차량의 운전병들은 주요 부속품을 뽑고 타이어의 바람을 뺀 후 차량을 떠나고 있었다.


18연대장은 공격개시시간이 임박한 2000 경에 예하 대대장에게 30연대의 동정을 주시하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 그런데 공격개시시간이 지난 2200까지도 30연대가 공격하는 기색이 없자 연대장은 연대 수색중대로 하여금 30연대의 공격 진척상황과 방대산으로 연결된 산간 소로 부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확인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결과, 9사단 부대들이 공격을 하지 않고 매화동 골짜기에서 방대산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18연대장은 돌파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18연대 전술지휘소에 있던 3사단장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3사단장은 그 이전에 이미 “만약 방대산을 중공군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3군단 병력은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위기로 빠져들게 되고 만다.”고 판단하여 23연대장에게 “1개 대대로 방대산 정상을 확보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우발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러던 중 3사단장은 18연대장의 보고를 받고서야 30연대가 공격을 하지 않고 방대산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 3사단장은 군단의 주력이 혼란상태에 빠져들어 이미 통제력을 잃고 있었으며 돌파공격부대인 30연대마저 공격을 하지 않고 철수하고 있는 상황 아래서는 돌파작전이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장비와 병력을 모두 철수시키지 못할 바에는 병력이라도 살려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된 그는 18연대의 공격을 취소하고 방대산을 경유하여 창촌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전쟁 전투사 현리전투> 1988  p161-168


3군단은 오마치 돌파작전을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9사단 30연대와 3사단 18연대의 오마치 돌파작전에서 30연대 1대대가 785고지를 점령하지 않고 방대산으로 철수한 것이 군단 붕괴의 시발이며 그에 대해서는 연대장과 대대장의 증언이 엇갈리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명확하게 책임 소재를 가렸어야 할 일이다.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는 9사단 30연대가 오마치 돌파를 포기함으로써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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