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기간 활약한 사단들 한국전쟁

 

부대명(현재) :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부대명(창설시) : 보병 수도사단

부대창설일 : 1950년 07월 05일

부대창설지 :

초대사단장 : 준장 김석원(金錫源)

모체부대 : 수도경비사령부

예하부대(창설시) : 보병 제1, 제8, 제18연대

한국전쟁개전시 부대위치 : 창설 전

한국전쟁휴전시 부대위치 : 경기도 포천 (제1, 제26연대, 기갑연대)


주요 전공 및 기록 :

1950.08.14 안강-기계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2개 사단(13, 15) 격퇴

1952.07.07-10.14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전투

1953.07.13-07.27 금성지구 전투


 


부대명(현재) : 제1보병사단 (전진부대)


부대명(창설시) : 보병 제1사단

부대창설일 : 1949년 05월 12일

부대창설지 : 서울 수색

초대사단장 : 대령 김석원(金錫源)

모체부대 : 제1여단

예하부대(창설시) : 보병 제11, 제12, 제13연대

한국전쟁개전시 부대위치 : 서울 수색(제11, 제12,제13연대, 제6포병대대)

한국전쟁휴전시 부대위치 : 경기도 연천 (제11, 제12, 제15연대)


주요 전공 및 기록 :

1950.08.03-08.30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 3개 사단(1, 3, 13)섬멸

1950.09.10-09.13 팔공산 전투에서 북한군 제1사단 격퇴

1950.10.19평양최초입성

1951.03.14 서울 재탈환




부대명(현재) : 제2보병사단 (노도부대)


부대명(창설시) : 보병 제2사단

부대창설일 : 1949년 05월 12일

부대창설지 : 충청남도 대전

초대사단장 : 대령 유승렬(劉升烈)

모체부대 : 제2여단

예하부대(창설시) : 보병 제5, 제16, 제25연대

한국전쟁개전시 부대위치 : 충청남도 대전 (제5, 제16연대)

한국전쟁휴전시 부대위치 : 강원도 철원 (제17, 제31, 제32연대)


주요 전공 및 기록 :

1950.07.24 해체

1950.11.07서울에서재창설(제17,제31,제32연대) 

1952.10.14-11.24 저격능선 전투


 

부대명(현재) : 제3보병사단 (백골부대)


부대명(창설시) : 보병 제3사단

부대창설일 : 1949년 05월 12일

부대창설지 : 경상북도 대구

초대사단장 : 대령 최덕신(崔德新)

모체부대 : 제3여단

예하부대(창설시) : 보병 제22, 제23연대

한국전쟁개전시 부대위치 : 경상북도 대구 (제22, 제23연대)

한국전쟁휴전시 부대위치 : 강원도 화천 (제18, 제22, 제23연대)


주요 전공 및 기록 :

1950.07.18-07.29 영덕 전투에서 북한군 제5사단섬멸

1950.10.01 38도선 최초 돌파 (예하 제23연대)

1951.05.16-05.22 현리 전투에서 후퇴 (중공군 공세로 제3군단 해체)




부대명(현재) : 제5보병사단 (열쇠부대)


부대명(창설시) : 보병 제5사단

부대창설일 : 1949년 05월 12일

부대창설지 : 전라남도 광주

초대사단장 : 준장 송호성(宋虎聲)

모체부대 : 제5여단

예하부대(창설시) : 보병 제15, 제20연대

한국전쟁개전시 부대위치 : 전라남도 광주 (제15, 제20연대)

한국전쟁휴전시 부대위치 : 강원도 화천 (제27, 제35, 제36연대)


주요 전공 및 기록 :

1950.07.17 경상남도 마산에서 해체

1950.10.08 경상북도대구에서 재창설(제27,제35,제36연대)

1951.08.18-08.22 피의 능선 전투



 

부대명(현재) : 제6보병사단 (청성부대)


부대명(창설시) : 보병 제6사단

부대창설일 : 1949년 05월 12일

부대창설지 : 강원도 원주

초대사단장 : 대령 유재흥(劉載興)

모체부대 : 제6여단

예하부대(창설시) : 보병 제7, 제8, 제10연대

한국전쟁개전시 부대위치 : 강원도 춘천 (제2, 제7, 제19연대, 제16포병대대)

한국전쟁휴전시 부대위치 : 강원도 화천 (제2, 제7, 제19연대)


주요 전공 및 기록 :

1950.06.25-06.30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2개 사단(2, 12) 섬멸

1950.07.08 예하 제7연대 2대대가 북한군 제15사단 관하 1개 연대 섬멸

1950.07.11 예하 제7연대 전장병 1계급 특진

1950.10.23-10.26 초산 전투 후 압록강 진격 (예하 제7연대 제1대대 제1중대)

1951.05.17-05.20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 섬멸




부대명(현재) : 제7보병사단 (칠성부대)


부대명(창설시) : 보병 제7사단

부대창설일 : 1949년 06월 20일

부대창설지 : 서울 용산

초대사단장 : 대령 이준식(李俊植)

모체부대 : 수도사단 (제7여단-수도여단-수도사단-제7사단)

예하부대(창설시) : 보병 제1, 제9, 제19연대

한국전쟁개전시 부대위치 : 경기도 동두천

 (제1, 제9, 제25연대, 제5포병대대)

한국전쟁휴전시 부대위치 : 강원도 화천 (제3, 제5, 제8연대)


주요 전공 및 기록 :

1950.07.05 해체

1950.08.20 대구에서 재창설 (제3, 제5, 제8연대)

1950.09.05-09.13 영천전투에서 제8사단과 함께 북한군 제15사단 섬멸

1950.10.18 평양 최초 입성 (예하 제8연대 제3대대 제9중대)


 


부대명(현재) : 제8보병사단 (오뚜기부대)


부대명(창설시) : 보병 제8사단

부대창설일 : 1949년 06월 20일

부대창설지 : 강원도 강릉

초대사단장 : 준장 이형근(李亨根)

모체부대 : 신편성

예하부대(창설시) : 보병 제10, 제21연대

한국전쟁개전시 부대위치 : 강원도 강릉 (제10, 제21연대, 제18포병대대)

한국전쟁휴전시 부대위치 : 강원도 화천 (제10, 제16, 제21연대)


주요 전공 및 기록 :

1950.09.05-09.13 영천 전투에서 제7사단과 함께 북한군 제15사단 섬멸

1953.07.13-07.18 금성지구 전투



부대명(현재) :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초기에는 청귀부대)


부대명(창설시) : 보병 제9사단

부대창설일 : 1950년 10월 25일

부대창설지 : 서울 중구 청계국민학교

초대사단장 : 준장 장도영(張都暎)

모체부대 : 신편

예하부대(창설시) : 보병 제28, 제29, 제30연대, 제30포병대대

한국전쟁개전시 부대위치 : 창설 전

한국전쟁휴전시 부대위치 : 강원도 철원 (제28, 제29, 제30연대)


주요 전공 및 기록 :

1951.05.16-05.22 현리 전투에서 후퇴 (중공군 공세로 제3군단 해체)

1952.10.06-10.15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2개 사단 섬멸



11사단  50.8.27 창설   9,13,20연대

12사단  52.11.8 창설   37,51,52연대

15사단  52.11.8 창설   38,39,50연대

20사단  53.2.9 창설    60,61,62연대

21사단  53.2.9 창설    63,65,66연대

22사단  53.4.21 창설  67,68,69연대

25사단  53.4.21 창설  70,71,72연대

26사단  53.6.18 창설  73,75,76연대

27사단  53.6.18 창설  77,78,79연대


 

수도사단부터 9사단까지는 Dr.Nam님께서 주신 자료이고 11사단부터 27사단까지는 조은성님께서 주신 자료를 요약한 것입니다.




설악산 전투 철수 중에 마주친 송요찬 사단장 한국전쟁

 

돌이켜 보면 설악산 전투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다. 깊은 골짜기와 암벽을 기어오르며 싸워야 했다. 게다가 식량보급이 제대로 안 돼 모두 허기에 지쳐 있었다.


우리 소대가 인접고지를 점령하고 있을 때 중대본부 전령이 비보를 가지고 왔다. 전령은 중대본부에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져 중대장 이 대위 이하 박격포 사수, 부사수, 그리고 초소 근무자 등 모두 6명이 전사했다고 말했다.


우리 소대는 대대장 명령대로 끝까지 점령한 고지를 지키고 있었으나 보급이 없는데다 적이 병력 보충을 받아 재차 공격해 온다는 정보에 따라 결국 오색약수터로 철수했다. 약수를 마시느라 법석대는 사이 우리 주력부대는 젬젬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았다.


“아이고 이거 큰일 났다” “야. 낙오되면 죽는다.” 우리는 소리소리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산위에서 따발총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겁을 집어먹은 채 마구 뛰었다. 적에게 생포되는 날엔 눈알도 모가지도 달아나고 만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철모를 집어던지는 병사도 있었다.


기력이 좋은 사람은 잘 뛰었다. 그러나 나는 영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마구 뛰느라 돌부리에 부딪힌 발가락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그때 우리는 낙하산 천과 낙하산 줄을 갖고 있었다. 나는 낙하산 천으로 발싸개를 하고 낙하산 줄을 칭칭 동였다. 그리곤 다시 혀를 빼물고 뛰었다.


아무리 기진맥진해도 놈들에게 사로잡힐 수는 없었다. 나는 살아서 할 일이 많았다. 다른 전우들도 그랬을 것이다. 어려서 누구보다 뼈저리게 고생한 나에겐 더 희망찬 인간다운 삶이 그리웠다. 비록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각오를 하고 군에 자원입대했으나 설악산에서 살아남은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삶에 대해 집착하게 했다.


신작로 가상엔 이름 모를 들꽃이 노랗게 피었고 숲속엔 진달래가 피어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와 동료들은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런데 암만 뛰어도 앞에 간 주력부대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풀기 위해 가끔씩 구보를 멈추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지럼증 때문에 길바닥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길가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찝차 한 대가 질주해 오고 있었다. 차 위에선 뽀얀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웬 찝차지 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다가오는 차 앞에 별판이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긴장과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찝차는 우리 앞에 멎었다. 우리는 번쩍 총을 앞에 들고 총례를 했다. 운전병 옆에서 뚱뚱하고 풍채 좋은 장군이 내렸다. 바로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이었다. 말로만 듣던 사단장 각하였다. 그때는 사단장을 각하라고 불렀다. 말만 들어도 벌벌 떨던 병사들이다.


그런데 송 장군은 초라한 몰골의 우리들을 쓱 훑어보고 나더니 찝차에 타라고 명령했다. 그리곤 “한꺼번에 다 탈 수 없으니까 나머지는 여기서 기다려”


우리는 기뻤다. 그러면서도 낙오된 것을 문책하려고 그러지 않나 해서 캥기기도 했다. 쌀가마를 싣듯이 엎드리고 짓밟으며 포개서 잔뜩 싣고 보니 찝차의 스프링이 땅에 닿을락 말락 했다. 정원 두배 가량 초과해서 편승시킨 스프링은 비포장의 우둘투둘한 길에 부딪혔고 그럴 적마다 차에 탄 우리는 하늘로 치솟곤 했다. 그렇게 우리 낙오자들은 중대 주력이 집결해 있는 양양으로 실려 갔다.


양양 집결지에 오자 사단장은 내리고 그 대신 운전병에게 “나머지 아이들을 다 실어와”하고 명령했다. 우리 병사들에게는 송 장군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호랑이 사단장으로 불리던 사단장에게 부하를 아끼는 관용이 있었던 것이다.

<세월을 넘어 사선을 넘어> 정형섭 p112-116  중공군 5월 공세시



60밀리 박격포를 지게에 지고 쏘면...... 한국전쟁

 

우리 대대는 연대장의 명령으로 소대장급 이상 지휘관이 집합한 가운데 새로 보급된 3.5인치 로켓포 사격 연습이 있었다.


대대장은 그때 로켓포 바로 뒤에 서 있다가 사격할 때 분출하는 강한 가스를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 현장을 목격한 우리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대대장은 우리들과 함께 한지 약 2개월 만에 우리와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들과는 개인적인 접촉을 자주 하면서 농담도 잘하고 부하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 친근감이 두터웠기에 모두의 슬픔은 한층 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켓포의 위력을 재삼 실감하기도 했다.

<아! 어찌 잊으랴. 그 날들을> 22연대 6중대 2소대장 강승희 p146


우리 8사단은 51년 10월 1일 백석산 1142고지를 점령 확보하고 중동부 전선 펀치볼 일대(양구-송현리-무능리)에서 북괴 5군단의 반격에 대한 기선을 제압하고 있었다.


10월 17일 우리 21연대는 680고지와 319고지 정령 확보를 고비로 좌익정면에 대한 제한공격을 일단락 짓고 16연대 정면의 931고지 공략에 중점을 두었다.


이 전투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당시 처음으로 중대에 보급된 57밀리 무반동총이 신기하게 보임으로써 사병들이 유심히 구경하다가 뒤에 서있던 두 명의 사병이 후폭풍으로 1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은 불상사가 발생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호국용사 6.25 참전 전투수기 제3집> 8사단 21연대 3대대 소총수 서점술 p291


우리 대대는 토기점이라는 곳에 있었다. 거진에서 내륙으로 조금 들어갔다. 바로 고성 남쪽으로 해금강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거기에는 이북에서 제일 크다는 건봉사라는 절이 있었다. 이곳에서 꽤나 오래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대대본부 작전과에 근무하게 되었다. 우리 대대는 동해안으로 오면서 보병 제11사단에 배속되었다. 한데 여기서 아주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보병들이 쓰는 박격포가 있다. 이 박격포는 네모난 포판 위에 포신을 45도 정도로 높이 올리고 포구 앞으로 포탄을 넣으면 포신 바닥에 닿으면서 추진약이 폭발해 포탄이 나가게 된다. 주로 많이 쓰이는 것은 60밀리 박격포인데 아주 작고 사거리도 짧다. 쏘는 것이 마치 장난감 같은 기분이 든다. 당시 부대에는 전투요원이 아닌 노무자가 있었다. 이들은 강제징용된 사람들로 주로 산에 탄약을 나르거나 땅을 파는 단순 노무를 맡고 있었다.


한 노무자가 이 쬐끄만 60밀리 박격포 쏘는 것을 보더니 포수에게 자기가 지고 다니는 지게에다 올려놓고 한번 쏘아보자고 제안을 했다. 포수 또한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소총을 쏴도 그 반동 때문에 어깨가 아픈데 하물며 60밀리 박격포를.......


결국 쏘고야 말았다.

지게를 진 채였으니 이 노무자가 어떻게 되었겠나? 그는 급히 차에 실려 갔다. 결국 죽지나 말았으면 하고 빌었다. 전쟁은 사람을 이렇게 단순치졸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어떻게 지킨 조국인데> 20포병대대 이돈형 p111

주의) 이 노무자가 어느 부위를 어느 정도 다쳤는지 매우 궁금하나  절대 따라 하지 마시오.


이성가 7사단장과 정진 3연대장의 갈등 한국전쟁

 

9월 26일 백석산에서 공방전이 다시 재개되었다. 주공부대인 8연대 2대대는 사단 포병과 항공 지원 하에 894고지에서 백석산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수류탄으로 돌격로를 개척하면서 진공을 계속해 나가다. 16:00경에 마침내 공격 선봉대대가 적의 종심을 돌파하고 백석산 정상에서 남북으로 솟아있는 두 개의 봉우리 중 남쪽 봉우리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3연대보다 먼저 봉우리를 탈취한 8연대의 선공대는 남쪽 봉우리의 정상에다 대공포판을 깔아 놓은 다음 곧 주력과 합세하여 150미터 북쪽의 봉우리를 향해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연대가 북쪽 봉우리를 거의 제압단계에 돌입했을 때 3연대를 직접 지원하고 있던 미군의 전차포가 8연대의 선봉대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무슨 포격이야?” 쌍안경으로 공격 장면을 지켜보던 사단장은 작전참모에게 소리쳤다. “3연대를 지원하고 있는 미 전차대의 오착탄 같은데 알아보겠습니다.”


사단장은 이 해괴한 일의 발생 원인이 미군 전차부대를 통합지휘하고 있던 3연대장의 짓으로 판단했다. 미군의 전차부대는 그의 지시가 없는 한 사격을 멋대로 할 수가 없었다. 선봉 공격 대대장인 임춘발 소령이 먼저 사단장에게 항의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사단장에게 대공포판을 깔아놓고 우리가 적이 아님을 분명히 표시해 놓았는데 아군이 전차포 사격을 가해 7중대의 소대장 2명을 비롯해서 선두 소대의 병력을 반 이상 잃었으며 무전기도 파괴되었다고 했다. 이어 8연대장 김기동 대령도 사단지휘소로 달려와서 “각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미군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연대가 백석산을 먼저 점령하는 것을 시기한 3연대장의 간교한 짓입니다. 각하! 이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이적행위인 만큼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셔서 규명하셔야 합니다.”


이때 3연대장과의 통화가 이루어졌다. “정 대령! 당신이 전차포 사격을 명령했소?” 사단장은 아직 정진 대령의 소행으로 단정할 수가 없었기에 감정을 억제하고 물었다. “저는 전차포 사격을 명령한 일이 없습니다.” “그게 양심적인 답변이요?” “양심보다도 전 명령한 일이 절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오. 잠시 후에 나와 만나서 이 사고의 진상을 규명합시다.”


아군의 전열이 흩어지자 적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포기했던 북쪽 봉우리를 다시 장악하고 대대가 병력 수습을 하고 있는 남쪽 봉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반격을 가해왔다. 대대는 반격해온 적과 필사의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적을 격퇴시키고 내일 다시 북쪽 봉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었다.


사단장은 사단의 종군 사진작가인 이명동 문관만을 대동하고 3연대 지휘소가 있는 금악리로 향했다. 연대 지휘소에서 차를 내린 사단장은 정진 대령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권총의 안전핀을 풀고 천막 안에 혼자 들어갔다. 마침 천막 안에 혼자 앉아 있던 연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단장에게 경례를 했다. 두 사람 모두 무거운 표정이었다. “각하! 제가 전차부대에 8연대를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절대 저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저도 인간인데 아군에게 포격을 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연대장의 그런 말에 사단장은 몹시 불쾌해진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사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당신 말고 사격명령을 내린 사람이 또 있단 말이오? 미군 전차부대는 3연대의 공격지원을 위해서 나와 있는데 당신의 사격지원 요청이 없는데 미군이 자기 멋대로 사격을 했단 말이오?” 사단장의 언성이 차차 격해지기 시작했다.


“각하! 저도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장교입니다. 그리고 이 정진 대령은 남의 연대가 고지를 선점한다고 시기심이 나서 그런 짓을 할 무식한 장교가 아닙니다. 나를 의심한다는 것은 다른 연대장들이 나와의 어떤 경쟁심에서 나를 꺾기 위한 그야말로 야비한 모함입니다. 이것이 모함이 아니라면 내가 사격명령을 내렸다는 증거가 있어야 할 겁니다. 전 그런 명령을 내린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 정 대령의 발뺌에 사단장의 음성이 더욱 높아졌다. “증거? 그럼 당신의 짓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의 짓이야? 당신은 그런 짓을 하고도 남는 비열한 장교인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당신의 짓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짓이야? 전차부대의 사격통제는 당신만이 할 수 있는데 당신이 모른다면 당신은 연대장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것이야.”


“각하! 이건 너무하십니다.” “설사, 그것이 당신의 짓이 아니라면 그 사고에 대한 진상을 규명할 사람은 사단장이 아닌 바로 당신인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책임만 회피하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일이야? 여하간 나는 당신에게 사격통제를 다 하지 못한 책임을 묻겠소. 아무리 당신이 발을 빼고 변명을 한다 해도 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거요.”


그렇게 말하고 사단장은 극도의 흥분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굵은 한숨만 내쉬던 이성가 사단장은 담배 하나를 피워 물고서 입을 열었다. “이 문관은 오늘 있었던 일을 어떻게 생각하오? 내가 이번까지 세 번째지만 오늘과 같은 사고가 발생한 원인을 보면 역대 사단장들이 잘못했기 때문이오. 적어도 사단을 지휘하는 사단장이라면 3개 연대를 동일한 수준의 전투부대로 육성해야지 어떻게 1개 연대만 강하게 육성해 놓고 2개 연대는 허약한 상태로 내버려 뒀느냐 하는 거요.”


“정진 대령은 내가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람이요. 누구보다도 공명심이 강하고 아집이 강한 사람이지.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감정이 많은 사람이요.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부임 초에 3연대의 병사에게 너는 누구를 위해 싸우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어요. 그랬더니 이병사의 대답이 연대장을 위해서, 그리고 3연대를 위해서 싸운다고 대답하더란 말이야. 물론 잘못된 대답은 아니지만 나는 그 말에서 정 대령이 3연대를 개인의 사병화 집단으로 육성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어요. 그런데 이 문관은 오래 전부터 이 7사단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많이 받고 있죠?”


“네. 저도 그런 느낌을 여러 번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사단이 전투를 제대로 할 수 없지. 그리고 3연대가 대한민국 전 육군에서 제일 강한 연대라고 정 대령이 자랑하고 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웃기는 일이요. 이러한 행위는 다른 2개 연대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칠 뿐이오. 보병 7사단장은 이성가가 아니고 3연대장인 정진이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사단장으로 있을 진 모르지만 있는 날까지 그런 폐단을 말끔히 시정할 거요.”


사단장은 정진 대령에 대한 조치문제를 심사숙고했다. 다른 연대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이 기회에 조치를 취해야 했다. 자기 자신의 공명심 때문에 고의적으로 사단의 작전을 망치고 사단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킨 행위를 생각할 때 당장 군법에 회부시키는 것이 사단장으로써 마땅한 조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가 세운 특출한 전공과 그의 장래문제를 고려하여 연대장직에서 해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짓기로 결심했다.


9월 28일 8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한 7사단의 각 연대는 축차적으로 철수하여 양구 남쪽의 삼포리와 대곡리로 이동 집결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사단은 미 10군단에서 배속이 해제되면서 육본 직할로 복귀되었다. 그리고 사단장은 정진 대령을 3연대장직에서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이소동 대령을 임명했다.

<이성가 장군 참전기 영천대회전>p306-313




부유한 양반들의 안빈낙도 조선시대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이 즐겨 노래한 것은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가난한 가운데서 공부하는 즐거움이었다. 양반들은 자신들이 지향해야 할 삶은 오로지 가난한 가운데서 도를 즐기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말을 해왔다.


그래서 조선시대 많은 사대부들은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에 만족하는 내용의 많은 시가들을 남겼다. “면앙정가(俛仰亭歌)”의 작가로 잘 알려진 조선 중기 명종, 선조 때의 문신 송순(宋純)의 아래 시조를 보자.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한 가난한 선비가 십년을 애써서 세 칸짜리 초가집을 지은 후 자신과 달, 청풍이 한 칸씩을 차지하고 나니 강산은 들일 방이 없어 둘러 두고 보리라는, 그야말로 청빈한 사대부의 고귀한 사상과 자연이 초가삼간을 매개로 합일되어 승화되는 내용의 아름다운 시조이다. 댓잎 사이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난 속에서도 도를 즐기는 송순의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송순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이처럼 청빈한 삶을 자랑스레 여겼다.


하지만 송순의 실제 삶은 안빈낙도와는 거리가 멀었다는데 그의 허위가 있다. 송순이 남긴 ‘분재기(分財記)’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분재기는 조선 시대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상속해준 기록이다. 요즘의 재산 상속서라고 보면 될 것이다. 송순의 분재기를 보면 그는 장녀에게 노비 41명과 전답 1백53두락을, 차남의 부인에게 노비 40명과 전답 1백42두락과 유명한 정자인 면앙정, 주위 죽림 등을 상속해 주는 등 8명의 자손들에게 약 2천석을 나누어 주었다. 이를 보면 남녀차별하지 않고 재산을 상속해 주던 당시의 상속 관행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그런 상속 관행이 아니라 그 재산 규모가 “나 한간 달 한 간 청풍 한 간”에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는 읊조림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고래등 같은 기와집, 경치 좋은 명승지에 지은 정자, 끝없이 펼쳐진 논밭에 달라붙어 개미처럼 일하는 수많은 자신의 전호(田戶 소작농)들과 노비들의 모습은 애써 외면한 채 자신은 십년을 노력해야 초가삼간을 지을 수 있는 청빈한 선비라는 공상 속에서 이 시조를 읊은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 모순의 극치이자 자기 기만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이 표방한 이상(안빈낙도)과 실제의 생활 모습(양반 대지주)이 달랐던 사대부들의 이런 현상이 조선 당쟁이 격화된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당쟁의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가 경제적 이익을 누가 가지느냐 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송순이 경상, 전라감사,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역임한 양반 관료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송순이 막대한 재산을 형성하거나 또는 최소한 물려받은 재산을 유지하는 데 그의 관직은 상당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 관직과 재산은 대부분 비례하는 함수관계에 있었다. 결국 조선 시대 당쟁이 격화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돈’이었던 것이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이덕일 p447-448


 

조선시대에 회자된 안빈낙도라는 삶의 형태도 사실은 가진 자의 여유일 뿐 절대빈곤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의 선비들은 술자리에서 시조를 읊으며 안빈낙도를 중얼거리면서 왜 토지소유의 불균형이나 반상의 차별, 소작제도의 불합리성 등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좀 더 극단적인 예를 들면, 소작료로 수확량의 반을 거두어 들여 창고에 쌓으면서, 또한 노비들의 고된 노동력을 통해 자신은 도식(徒食)하면서 입으로만 읊조린 안빈낙도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흔히 가난한 선비가 선비의 진정한 기질을 잘 간직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실재했던 선비는 대개 부유한 지주였다. 어마어마한 갑부는 아닐지라도 일단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 특히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경제활동에서 필수불가결한 두 핵심인 토지(생산수단)와 노비(노동력)를 소유함으로써 편안히 앉아서 재화를 쌓는 자들이었다.


영남 사림의 종장(宗匠)의 위치에 오른 김종직은 선산과 밀양과 금산 일대에 전답을 보유했으며, 소유한 노비는 그 전답에 따라 사는 외거노비를 제외하고도 뜰에 가득할 정도로 많았다. 김일손의 전택과 노비도 경향 각지에 분포했는데 가는 곳마다 큰돈을 들여 정사(精舍)와 누정(樓亭)을 세울 정도로 공고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시대 가장 대표적인 선비라 할 수 있는 이황도 소유 노비가 367명이었으며, 예안 봉화 영천 의령 풍산 등지에 걸쳐 논은 1166마지기, 밭은 1787마지기라는 엄청난 규모의 전답을 보유했다. 마지기는 면적 자체보다는 수확량에 따른 기준이라 그 넓이를 일률적으로 가름할 수는 없으나, 논 한 마지기가 대략 150-300평, 밭 한 마지기가 대략 100-400평 정도다. 그렇다면 최소의 면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이황은 논과 밭 각각 17만평 이상, 도합 34만평 이상을 보유한 셈이다. 그는 굳이 벼슬을 하면서 국가의 봉급을 받을 필요조차 없는 부호였다.


청빈이니 안빈낙도니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런 재력가들이 읊조린 빈(貧)의 의미는 막강한 재력이 받쳐주는 ‘이상한 가난’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손은 자기 스승인 김종직의 삶을 가빈무복예(家貧無僕隸), 곧 ‘집이 가난하고 노복도 없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가난은 스승에게 예의를 갖춘 표현일 뿐으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자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자칭 타칭 선비들이 권력을 잡은 조선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가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선비들은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상업을 천시하고 억제하고, 도로를 뚫고 수레를 이용하고 선박을 통해 무역을 장려하자는 주장을 다 물리친 선비들에게 과연 책임이 없겠는가 말이다. 심지어 개인 덕목으로 중시한 청빈과 안빈조차도 절대빈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가진 자의 유유자적이었을 뿐이니, 자기 집안은 토지와 노비를 보유해 여유로우면서도 나라는 항상 가난하게 방치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가로서 본연의 임무를 방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계승범 p66-70







예학(禮學)으로 이름 높은 학자 김장생金長生(1548-1631)은 방납과 고리대로 백성들을 수탈하여 말썽을 일으켰고 교동도의 고언백高彦伯(?-1609)은 자신의 집에 부역을 부과했다고 현감을 구타했다.


이 글은 <조선 지식인의 위선> 김연수 p323에 나오는데 이 책의 문제점이 각 기술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책 뒷부분에 참고문헌으로 수십 권 책 제목과 저자만 나열해 놓았기 때문에 어느 책에서 인용했는지를 알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고언백의 경우는 제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저 부분을 확인했지만 김장생의 경우는 아직 어느 기록에서 인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김장생이 방납과 고리대로 백성들을 수탈했다는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 분은 꼭 답글 달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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