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에 관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발표한 “북간도에 재한 아 독립군의 전투정보”에는 일본군 사망자 157명, 중상자 200명, 경상자 100여명으로 나와 있다.
<독립신문> 12월 25일자 4쪽,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금성출판사 p191
그런데,
일본군의 보고 자료인 “봉오동전투상보”에는 병졸 1명 전사, 병졸 1명 부상, 순사 1명 부상으로 되어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5집 1991, 579쪽
우리측 발표에 따르면 독립군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1200명이나 사살한 데 비해, 피해는 전사 60명, 부상 90명에 지나지 않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금성출판사 p192
일본 영사 비밀보고에 의하면 이도구전(二道溝戰)에서 가납(加納)연대장, 대대장 2명, 중대장 5명, 소대장 9명이 전사하고 하사관 이하 전사자 900명이라 하였다.
<무장독립운동비사> 채근식 p88-89
그런데,
일본의 연구자 사사키 하루타카(左左木春隆)는 출동 당시 일본군의 전투 보고서를 종합한 결과 청산리전투를 통틀어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 말 10필의 희생을 치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장교 희생자는 한국 측의 주장과는 달리 전혀 없었다고 한다.
<朝鮮戰爭前史としての韓國獨立運動史の硏究> 國書刊行會,1985, 509-514쪽
연변대학 김춘선 교수는 1920년 10월 27일 이후에도 중국 측 문서에 일본군 가노(加納) 연대장의 활동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청산리전투 당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다고 밝혔다.
발로 쓴 청산리전쟁의 진실 <역사비평> 200년 가을호, 277쪽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김경천은 1921년 3월 하순 “청산리대첩”에 관한 임시정부 군무부측의 포고문을 보고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기록했다.
“상해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 군무부의 출판으로 북간도 군정서 총재인 서일 군의 포고문이 북로군 전투상보라 하는 것이 왔기에 나는 큰 희망으로 보니 매우 심장을 단(斷)케 하는 통념한 어구도 있다. 그러나 그중에 좀 과도한 철란이 있는가 한다. 물론 북간도 금번 사건은 나도 대개는 아는 것이다.
그 상보에 왈(曰) ‘일본군 사자(死者)가 연대장 1인, 대대장 2인, 장교 이하 1254인, 상자(傷者)가 장교 이하 200여인이라 하며, 그 군정서 군대는(총수가 400여인이다) 사자(死者) 1인이오, 상자(傷者)가 5인이오, 포로된 자가 2인이라고 한다.’
그런즉 이 군대는 능히 400으로 적의 연대(혼성으로 포병 수문이 있는 것임)와 접전하여 400의 3배 이상을 전멸시킨 것이라. 동서(東西) 전사(前史)에 그런 예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군대는 일본군의 공위(攻圍)를 만나서 도피한 것인가 하였더니 이같이 공개할 만한 승(勝)을 얻음이라 한다.
나는 우리 민족이 허언(虛言)을 좋아하며 실행(實行)이 결(缺 *빠지고)에 불반(不伴 *동반하지 않는)하는 인성(因性 *인습)이 있음을 한(恨)하는 바러니 금(今 *이번)도 역연(亦然 *역시 그러하다)이다“ 김경천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 48쪽
김경천도 청산리대첩(?)에 관한 임시정부 군무부측의 전과 보고 기록이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의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기술보다는 김경천 장군의 소감에 더 신뢰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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