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도선이 가로막히면서 남농북공(南農北工)의 산업구조는 한반도의 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고 갔다. 남한은 한반도의 쌀 총생산량의 76%에 이르나 150만 명의 월남자들을 수용하게 된 데다 흉작이 겹쳐 식량은 태부족했으며 북한은 소련군이 들어와 공장을 뜯어가면서 쌀까지 실어가 버려 남북의 식량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6년 2월 미소 공동위원회의 발표를 계기로 남북교역이 이루어졌으며 이 교역은 1949년 3월 31일까지 계속되었다.
남북교역 장소는 38도선 일대(일부 해안 포함)에 약 56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교역방법을 보면 북한 측은 조선교역이란 통제기구를 만들어 놓고 일사불란하게 물품을 통제하는데 반하여 남한 측은 제각기 상사(商社)에서 물품이 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에다 북한은 남한에서 활동 중인 공산당의 공작금을 보내기 위해서도 그렇거니와 남침 준비를 위한 첩보 수집을 위해 조선교역에 종사하는 자들을 첩보원으로 메웠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남한에서는 무질서한 교역을 통제하기 위해 육군본부에서 상인들에게 교역증을 발급했으나 그 실효는 거두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개별적으로 하는 보따리장수가 더욱 판을 쳤기 때문이다.
교역물을 보면 남한에서는 주로 의약품, 전기제품(전구 등), 생고무, 면직물, 타이어와 자동차 부속품, 재봉틀 등이었는데 북한에서는 명태, 북어, 오징어, 카바이트, 인삼 등 거의가 식료품이었으며 흥남에서 생산되는 비료나 농기구 등은 보내지도 않았다. 여기에 보따리장수들은 부피가 작고 값나가는 다이아징, 페니실린, 담배 등 인기품목을 북쪽으로 져 날랐다.
필자가 당시 남북교역의 중추를 이루었던 유정리(양문리 북쪽 1킬로미터 지점으로 당시는 북한 측의 물품 집적지)에 살며 교역상황을 직접 지켜보았던 이정식을 만나 그 실태를 알아보았다. 그는 전쟁 전에 월남하여 방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군대생활을 했기에 이 증언은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살던 유정리에 북한에서는 강원기업사를 만들어 민간인으로 운영했다. 북한에서는 명란젓, 동태, 북어를 주민들이 이고 지고하여 38도선을 넘어 성동 2리 벌판에 갖다 놓으면 남한에서는 우마차에 군복기지(옷감), 군화(워커), 짚차 부품, 총기류가 올라왔다. 이때 나는 북한 측 사람이었지만 ‘저럴 수가 있을까’하고 남한이 크게 잘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강원기업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북한의 첩자였는데 내가 월남하고 나서 얼마 후(6.25 전) 그들 전원이 북한 물건을 몽땅 가지고 월남해 귀순하였다.”
즉 남한에서는 전략물자가 올라가는 대신에 북한에서는 당시의 말로 ‘술 안주감’이 내려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주민이나 장병들은 불만과 걱정이 대단하였다.
바로 이 무렵(1948년 11월) 개성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제 1사단장으로 부임한 김석원은 남북교역의 실태를 면밀히 조사한 후 대통령에게 부당성을 직소하여 정부에서는 1949년 3월 31일자로 남북교역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정보획득이란 명목으로 군고위층의 친지들이 개입하여 교역이 성행되고 있었다.
마침내 김석원은 이 대통령에 건의하여 ‘단속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9년 4월 북한에서 토성으로 넘어오는 북어 20 여 트럭분과 비단 500 여 만원어치를 압수했다.
이 후에 채병덕과 김석원 사이에 벌어진 사태를 후일 김석원의 <노병의 한>에서 옮겨본다.
“나는 압수한 물품을 사단 정보참모, 군수참모, 부관참모(당시는 고급부관), 헌병참모 입회 하에 이를 처분하여 송악산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병사들에게 부식으로 일부를 충당하고 나머지는 음료수, 과일, 과자를 사서 지급했다. 또한 전투 때 탄약을 운반한 주민 400 여명에게 보상으로 지급했으며 나의 밥상에는 ‘북어 꼬리 하나 올려놓지 말라’고 엄명해 놓고 있었다. 얼마 후 안 일이지만 하주는 육본 고위 장성의 조카였다. 또 어떤 K국장은 하주가 자기 아버지라고 압력을 가해 오기도 했으나 나는 ‘내 아버지라도 못 풀어주겠다’고 버텼더니 마지막으로 진상조사라고 하면서 1개월이나 사단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부정은커녕 북어 대가리 하나 먹은 사실이 없음이 밝혀졌다. 나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총참모장과 함께 두 번씩이나 이 대통령에게 불려가 그때마다 관계자의 엄단을 주장했다가 나와 채가 군복을 벗게 되었다....... 마음대로 압수해서 처분한 나의 행위는 법치국가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당시의 정치풍토가 이런 부패자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한 것이 6.25를 막지 못한 약한 군대가 되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게 되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것은 정당한 명령에 한한다. 만일 상관이 ‘항복하자’ ‘도둑질 하자’고 한 명령까지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김석원도 “법치국가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었겠지만”하고 술회하여 행위 자체의 잘못은 시인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한편 채병덕도 대통령 앞에 섰을 때 “육군본부의 체면손상이 문제였지 선배로서는 존경합니다.”고 김석원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채병덕이 과연 부정에 개입했느냐의 여부가 문제인데 당시의 1사단 예하 지휘관 및 참모 그리고 육본의 고위 장성들은 그의 결백을 증언하고 있으며 모든 자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김석원에게 분노를 참지 못하게 한 것은 일부 국장급의 친척들이 개입(<노병의 한>에서는 K국장의 아버지라고 쓰고 있어서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사실이다)한 사실이었다.
일본군 출신이란 죄책감 때문에 군에 들어오는 것조차 미루고 근신했던 그가 ‘독립된 한국군을 위해’ 여생을 바치려 한 마당에 이런 망동을 보고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설에는 양자 간의 이간을 도모한 3자의 모략이라고도 하나 그들의 경륜으로나 모든 것을 볼 때 자기 판단이 흐려 타의에 의하였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허와 실> 안용현 p129-131
물자를 압수당한 화주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반발하여 각계 요로에 진정을 하는가 하면 채병덕 총장에게는 군부의 처사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리고 김석원 사단장이 물자를 임의처분하면서 착복한 혐의가 있다고 모해하였다.
채병덕 총장은 전봉덕 헌병사령관에게“헌병사령부에서 철저히 조사하라. 만일 김석원 사단장에게 부정혐의가 드러나면 가차 없이 구속해 버려라”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헌병사령관은 진상조사에 나섰다.
이런 정황에서 1사단 헌병대장 이풍우 소령이 김석원 사단장의 심복이라 해서 해임되고 이익흥 소령이 그 후임으로 보임되었다. 수사요원들은 김석원 사단장의 명륜동 집과 성남중학교 주변에까지 배치되었다.
그러나 헌병사령관은 김석원 사단장에게 부정착복의 혐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구속불가”라고 복명하였다.
김석원 사단장은 그 자신이 착복혐의를 받아 ‘정보원에 의해 뒷조사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반발하여 명태처리에 대해 세밀히 보고함과 아울러 태도를 더욱 굳혔다고 한다.
<6.25전쟁과 채병덕장군> p102-117
업자는 육군본부에서 발급하는 교역증을 수급하는데 혈안이 되었으며 이것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막대한 이익이 저절로 굴러들어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채병덕 참모총장과 김석원 준장을 예비역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명태사건은 더 이상 정치문제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으나 흑백은 밝혀지지 않은 채 끝났다. 그러므로 배후에 무엇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경향이 없지도 않다.
김석원 장군은 이른바 고전적인 무사다운 풍격을 갖는 군인으로 협조성이 부족하다던가, 융통성이 없다는 중평이다. 전쟁이 시작되어 사단장으로 재임명된 후에도 이러한 결점 때문에 오래 꽃피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잘못된 사람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너무나도 정의감과 독자성이 강하여 연합작전하는데 걸맞지 않은 성격이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이 건에 대하여 이응준 장군은 “그것은 김석원의 고집과 완고함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채병덕은 수뢰할 수 있는 사나이가 아니다. 법적으로 볼 때 채병덕의 명분이 옳다. 그러나 김석원은 한번 마음먹으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하는 성격이므로.......”라고 웃으면서 말해주었다.
채병덕 총장의 결백을 믿고 있는 사람은 많다. 총장 보좌관인 이상국 장군은 “나는 채총장의 부엌까지 알고 있는데 그는 그야말로 돈이 없었다. 만일 그가 부정을 저질렀다면 부덕(婦德)이 고매한 백경화 부인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고 집안 살림이 그처럼 쪼들리지 않았을 것이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는 지금은 밝힐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정이 숨어있는 것 같다. 이 결과를 어떤 장군은 “이것은 일본육사출신의 단결에 쐐기를 박으려는 타 계열의 모략으로 문제가 커진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예편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했다. 사람 좋은 두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다”라고 그 이면이 있다는 듯 말해 주었다.
<한국전비사 상권> p480-489 중요부분만 요약한 것이어서 문맥이 맞지 않음.
이 남북교역사건은 단순히 채병덕 육참총장과 김석원 1사단장의 대립이 아니다. 실제로는 육본 고위간부로 있으면서 '하주가 내 조카요', '내 아버지요' 한 자들이 당시 한국군 내부의 부패의 주범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 사건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못하게 되자 김석원 장군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계속 군 요직에 있으면서 국민방위군 사건이나 김창룡 특무대장 저격사건에도 관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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