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에게 말고삐를 쥐게하고 정탐하는 군관 조선시대

조선 양반들은 말을 탈 때 아랫사람에게 말고삐를 잡게 했다. 그러니 고속 운행 수단인 말을 타도 사람의 보행속도를 넘길 수가 없었다.

 

이일 장군은 한 군관에게 적진의 상황을 탐지하게 했다. 그런데 정탐을 맡은 군관은 병사 두 명에게 말고삐를 잡게 하고 천천히 나아갔다. 다리 밑에 있던 적군이 조총을 쏘아 군관을 말에서 떨어뜨리고 머리를 베어 달아났다. 전쟁 중 적진을 정탐하는 군 장교가 적군 앞에서 고삐 잡힌 채 천천히 걸어갔다니, 세상에 이런 군대도 있는가? 임진왜란 때 조선의 군 기강이 극도로 해이했고 군사훈련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일화다.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p97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년 조선시대

두 얼굴의 조선사 - 군자의 얼굴을 한 야만의 오백 년, 조윤민

 

조선은 도덕정치로 위장한 철저한 계급정치가 관철되는 위선의 나라였다. 지배층의 이익 확보와 욕망 추구를 이(理)와 도(道) 같은 사상 개념으로 포장해 정당화하고 신분질서와 사회의 위계 구조를 영속시키고자 했다. p11

 

학자관료들이 넘치던 17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 공간에는 모략과 증오, 폭력의 권력초상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p25

 

조광조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16세기 사림이 추진한 유교화는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고통을 없애는 근본적 사회개혁이 되지 못했으며 유교 가치와 규범에 반하는 사회 기풍을 바로잡는 선에 머물렀다. 16세기 사림 세력의 부상과 이들이 추진한 유교화 정책은 오히려 양반 계급의 사회적 이념적 기반을 더욱 다질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 p62

 

많은 사림이 대지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런 추세에서 백성 대다수를 위한 혁신적인 토지개혁이 나올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들은 토지 확대와 노비 확보에 열을 올렸다. p66

 

강압과 위력으로 탈취에 가까운 수탈을 저지르면서도 성인의 도를 읊고, 백성을 먹여 살린다는 왕도를 논하는 조선의 사림. 하지만 실제의 조선 사회는 그들이 신봉하는 유교경전이 뒤집힌, 전복된 현실의 세계였다.

 

국가의식이 무딘 조선 지배층의 작태는 결국 조선의 마지막 날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1910822, 일본 정부는 병합늑약을 그달 25일에 공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대한제국 정부에서 조약 공포를 나흘 뒤인 29일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28일에 있을 대한제국 황제 즉위 4주년 축하기념식과 연회를 치른 뒤에 발표하기를 청한 것이다. 이날(28) 대연회에 신하들이 몰려들어 평상시처럼 즐겼으며, 일본 통감 역시 사신의 예에 따라 그 사이에서 축하하고 기뻐했다. 세계 각국의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은 한국 군신들의 달관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p86

 

양반층은 지배체제가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더욱 강한 결집력을 보였다. 양반층은 국운이 쇠하던 19세기에 왕조의 민란 제압을 지원했으며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항쟁에도 진압군으로 참가해 전과를 올렸다. p102

 

심지어 조선의 양반은 영속적 지배를 위해 외세의 힘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학농민항쟁 후반기에 이들은 일본군과 협력해 농민군을 죽이고 저항을 억누른다. 양반에게 기존 지배질서 유지는 그 무엇에도 우선하는 목표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농민군은 과세와 토지제도의 개혁, 부패한 관리의 처벌을 요구했지 지배질서를 완전히 뒤엎고 왕조체제를 타도하는데 목표를 두지 않았다. 그토록 오랜 기간 억눌리고 수탈당해왔으면서도 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못한 것은 바로 조선 지배층이 수백 년 걸쳐 행한 조선사회 유교화의 성과였다. p103-104

 

조선 최고의 유학자이자 선비인 이황은 적자와 서자의 구분은 나라와 가정을 유지하는 근본이라고 했다. ‘이른바 예법이란 적서의 명분과 귀천의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예법이 허물어지면 서얼이 적자를 핍박하고 비천이 존귀를 능멸할 것이니....... 명종실록 8107p134

 

달레 신부가 파악하기에는 조선은 기근으로 백성이 죽어나가는데도 곡물교역을 더 이상 확대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이런 믿기 어려운 정책이 나오게 된 것은 조선 지배층이 나라의 안전을 위해 쇄국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p168

 

조선의 관리 계층은 상인이 장사를 해서 돈을 벌게 되면 이들이 손쉽게 계급 상승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관리 계층의 이런 질시가 상업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윌리엄 그리피스, 밖과 안에서 본 코리아 p169

 

임금이 편액을 내려 공인하는 사액서원은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를 지급했다. 사액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혜택을 받았다. 일반서원의 경우도 실제로는 조세를 부담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비교적 넓은 토지를 보유한 서원은 이러한 특권에 힘입어 인근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서원은 군세를 내세워 공공연하게 잡부금을 모으기도 했다. ‘서원에 제수 비용이 필요하니 얼마를 바치라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발송해 돈이나 물품을 징수했다. 문서에 서원의 도장을 찍었다고 해서 이를 묵패(墨牌)라고 했다. 이 묵패는 대개 서원에서 강상을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주민을 호출하여 사사로운 형벌을 가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송시열을 배향하는 괴산의 화양서원은 그 정도가 심해 아예 화양묵패라는 명칭을 얻기도 했다. 화양서원의 유생들은 전라도 지여까지 진출해 건물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재물을 거둘 정도였다. p284

 

또한 서원은 재물을 불리어 이를 운영비용으로 충당했다. 향촌 주민에게 돈을 빌려 주고 그 이자를 취해 재산을 늘려나가는 식리는 당시 서원과 서당 등 사학기관의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p285

 

조선 지배층은 의례문화를 통해 신분 간에 다름이 있고 분별이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 같은 문화적 상징의 차별화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내면화하고 이를 정당한 것으로 승인받고자 했다. p323

 

명분론은 권세를 누리고 부를 향유하려는 의도를 감추기 위해 온갖 수사를 동원하는 선전문구에 가까웠다. 조선시대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욕망의 정치도덕정치라는 허울로 가리려 한 조작과 통제의 지배기였다. p342


조선 관리들은 나라 망하는 순간까지도 백성들 뜯어먹었다 조선시대

모든 조선 사람들은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라는 것을 안다. 자신과 그의 가족들에게 줄 음식과 옷 이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빼앗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부러 부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 이사벨라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관리의 탐욕에 빼앗길 것이 뻔해서 재산을 애써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조선 민중의 좌절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인식은 당시 일본공사들의 비망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정한론에서 시작하여 조선병탄이란 장기 전략을 가지고 부임했던 일본공사들은 본국의 조선 대응 전략 수립에 관한 정보 수집을 위해 매우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조선이 강대국의 수중에 떨어질 경우 지정학적으로 일본의 안전에 치명적인 위협 요인이 된다는 강박관념에서 조선의 내정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1892년에 일본공사로 부임했던 오이시 마사미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은 이미 망실되었는데, 다만 다른 나라가 아직 이를 집어삼키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른바 국가를 조직하는 골격이 모두 붕괴해버려서 거의 절망적인 지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이시 마사미는 그 증거로 강대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면서도 국경을 방위할 군사가 한 명도 없는데다가 해안에 군함이나 군항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국방력이 아프리카 토인보다 못한 세계 최악이고, 관리의 부패와 뇌물수수로 정부의 재정이 궁핍할 뿐만 아니라 경제 전체가 침체되었으며, 근대식 교육제도가 미비해서 앞날의 희망도 보이지 않고, 이러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책을 강구할만한 인재도 없기 때문에 한국은 망한 나라나 다름이 없다라고 신랄하게 비평했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일본인 고문관제가 실시되면서 탁지부 재정고문으로 취임한 메가타 다네타로는 종래 수령과 아전이 겸하던 징세 업무를 분리하여 13도에 세무감을 두고 세금의 직접징수를 추진했다.

 

그러나 조선이 외교권은 박탈당했어도 내정에 관한 통치권을 행사하던 시기여서 추진력에 한계가 있었고, 아전들은 징세대장을 내놓지 않고 버텨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관리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토지를 과세대장에서 누락시켜 사적으로 세금을 착복하는 일이 횡행했는데, 이를 은결(隱結)이라고 했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세금을 징수하던 당시에 비옥한 전답은 과세대장에서 누락시키고, 등재한 농지도 경작면적을 축소하여 그 차감부분에 대한 세금을 사적으로 편취한 것이다.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한 농민들에게는 은결을 빼앗아 토지를 사점(私占)했다. 그렇게 치부한 관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구한말의 전설적인 공주 갑부 김갑순도 이런 방법으로 거부가 된 인물이다. 합병 후에도 치부를 계속한 김갑순은 충청남도 청사가 들어설 예정이던 대전 일대 땅을 매점하고, 그중 6천 평을 청사 부지로 무상 기증하는 꼼수로 일대 땅값이 폭등하도록 하여 한강이남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1907년 제3차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내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일제는 아전들의 징세권을 박탈하고 과세대장을 새로 작성하여 직접징수에 나섰다. 은결의 병폐가 근절되면서 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1905216만원이던 지세 수입이 1910년에는 3배 가까운 600만원으로 급증하였다. 국고의 절반이 탐관오리들의 뒷주머니를 채우는데 들어갔다는 사실이 통계로 입증된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에 투입한 막대한 전쟁비용(19억 엔, 전쟁 당시 한 해 예산의 8)을 조달하기 위해 13억 엔의 외채를 발행했으나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전후 공황을 겪을 정도로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조선합병이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7년의 제3차 한일신협약을 기점으로 조선의 내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마당에 합병을 서두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데는 이런 사정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곳간을 들여다보니 누락된 재원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합병에 따른 재정적 부담보다는 세입증대에 따른 실익이 크다는 사실에 고무됐다. 부패한 조선 관리들이 착복하고 있던 세금만 제대로 걷어도 합병에 따른 경제적 이익이 막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발악적으로 합병을 밀어 붙였다.

 

일제는 합병을 앞둔 19103월에 토지조사국을 통감부에 설치하였고, 합병이 되자마자 토지조사령을 발동(1912)해 전국적인 토지조사 사업을 벌여 지적(地籍)을 일제히 정리했다. 당시 세입의 대부분이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지세였기 때문이었다. 부패한 관리들이 착복하던 은결은 고스란히 총독부의 식민통치자금 조달의 재원이 되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합병으로 나라가 망한 이후에 일어났다. 일제는 합병에 대한 조선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합병 당시 체납 세액을 일괄 탕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은결을 통해 부를 축적하다가 일제의 직접 징수로 치부의 길이 막혀 있던 지방 수령들은 이 사실을 숨기고 마지막 쥐어짜기에 나섰다. 일제관리가 새로 부임하기 직전의 과도기를 노린 탐관오리들의 체납 세액 착복이 숱하게 일어났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개인적인 치부에만 급급했다. 비숍 여사가 한탄했던 관리들의 부패상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근대화에 대한 미몽 이전에 조선은 스스로의 부패로 무너졌다.


<조선을 탐한 사무라이> 이광훈 384-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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