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사단의 미호천 전투 김석원 장군 이야기

 


 제 1연대는 진천 전투 후 오근장에서 제 9연대를 흡수하여 재편성되었는데 대체로 제 1연대 병력은 제 1대대로, 제 9연대 병력은 제 2대대로 그리고 나머지 양 연대의 병력을 규합하여 제 3대대로 편성하고 연대장은 제 1연대장이었던 이희권 중령이 그대로 머물었다.


 미호천은 청주 북쪽 7Km에서 동서로 흐르는 금강의 지류이며 사단 정면의 하폭은 200m, 수심은 1m, 유속은 완만하여 인마는 물론 전차 및 포도 도섭이 가능하며 다만 하천이라는 심리적 영향만을 줄 뿐 작전에는 피아간에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사단은 적의 기도를 거부하기 위해 팔결교(미호천 교량)를 폭파하고 이어서 14:00에는 사단에서 요청한 항공지원으로 오근장 이북에 예상되는 적의 집결지를 강타하여 또 한차례의 손실을 주었다.한편 각 부대는 접적없이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정비했다.

 
 7월 12일 이날 새벽부터 날씨가 흐리면서 오후에는 비가 쏟아졌다. 적은 전날 두 번에 걸친 공폭(空爆)으로 혼란을 일으킨 듯 움직임이 활발하지 못했으나 이날 10:00부터 북안(北岸) 일원에 그들의 정찰대로 보이는 병력이 배회하면서 도하점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었고 14:00에는 화산리(오근장 북쪽 7Km로 미호천 북안)에 1개연대규모로 집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면한 북2사단장 최현은 예하 부대장들의 휴식 건의를 일축하고 “적의 제 1군단 사령부가 있는 청주를 점령해야 한다”고 발광하였다는 것이다.


 독전에 몰린 그들은 서둘러 도하를 꾀하여 화산리에 병력을 집결한 것인데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군단(장 김홍일 소장)에 요구하여 전포 11문으로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게 하였다.


 괴수(魁首)들의 어거지 독전으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무질서하게 운집하였던 그들의 1개 연대규모는 삽시간에 800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손실을 보고 지리멸렬 상태로 분산된 듯 하였다.

 
 이때의 정경을 포병중대장 김찬복 대위는 회상하기를 “포격을 유도하던 관측장교 박승옥 소위는 얼마나 신바람이 났던지 파리가 약을 먹고 떼죽음을 당하는 것 같다고 표현하였고 나 자신 오랜만에 대포병전과 병행하여 적을 섬멸하여 처음으로 포병에 몸 담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장이 입수한 첩보(항공정찰통보)에 의하면 오근장 -옥성리간의 586번 도로상에 트럭 9대, 진천 남쪽에 3대, 그리고 성환-진천간 도로에 6대를 각각 발견하였다는 통보와 대안의 움직임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은 틀림없이 야간도하를 기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전 부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계를 강화하라고 강조하였다.


 사단장의 이러한 판단은 적중하여 21:00부터 적은 步(보)戰(전)砲(포) 협동하에 화산리 및 오근장으로 도섭을 강행하려 하였다.


 이때를 기다려던 제 18 및 제 1 양 연대는 포병의 탄막사격과 함께 최후저지사격으로 강중에 들어선 적을 반도역격(半途逆擊)으로 쓸어버리니 그들의 초동(初動)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미호천은 적시(敵屍)의 붉은 피로 물들었다.


<한국전쟁사 개정판 2권>p308-309

 


덧글

  • 미연시의REAL 2010/04/05 23:34 # 삭제 답글

    결국 교두보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으면 강도하에서 적의 포병대 앞에 작살난다는걸 보여주는건가요?
  • 금성천 2010/04/08 16:02 # 답글

    김석원 장군의 작전능력도 볼 수 있고 서로 약간 껄끄러웠던 김홍일 군단장과의 협조도 아주 잘된 사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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