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교 폭파 사건의 기승전결 한국전쟁

 

1. 6월 27일 새벽 2시 이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은 채 경무대에서 비상 각의가 열렸다. 신 장관은 전 총리 이범석씨를 각의에 초청했다. 그의 오랜 군사 경험에 비추어 많은 사람들이 실제 한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관리(장교)들보다 그의 견해에 더 신뢰를 두고 있었다.


이 씨는 정부를 한수 이남으로 옮겨 활동의 자유를 가져야 하며 서울 쟁탈전에 빠져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그는 서울 방어계획을 설명했는데 가가호호 시가전을 벌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강을 건넌 뒤 한강 다리를 폭파하도록 제의했는데 그것은 적이 쉽게 도강할 수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서울에 남은 국군들이 퇴각할 길이 차단됨으로써 보다 완강하게 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박사와 미국대사관 Embassy At War> 해롤드 노블 p40



2. 이범석은 1950년 6.25 전쟁 직후의 경무대 각료간담회에 이승만의 부름을 받아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당시 총무처장 전규홍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범석 장군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 할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서울을 사수하느냐, 아니면 포기하고 내려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도저히 서울 사수가 불가능한 일이라면 우선 시민들을 전부 피란시켜야 합니다. 또 요원들을 철수 시킨 후 한강 다리를 전부 끊어야 합니다.’ 이 장군의 이 말을 들은 신성모는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뒤로 돌아 앉아 뭔가 메모를 했다

<월간조선1988.6>



3. 커다란 비극이 발생했다. 자정, 한국군에 배속되어 있던 조지 세드베리 2세 소령은 미 군사고문단 본부에 놀라운 소식을 전화로 알려왔다. 한국군 약 1만 명과 장비가 도하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한강교를 폭파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명령은 한국군 고위사령부에서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으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큰 소리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100킬로그램 이상의 거구였는데 돼지라는 별명을 스스로도 기꺼이 받아들일 정도였다. 그러나 군인답지 않은 외모와는 달리 그는 용사였다. 몇 시간만 더 교량을 고수한다면 며칠 내로 당장에 필요한 병력과 장비가 살아남게 되리란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국방부 고위 관리는 즉각 폭파시켜서 비록 한국군 수천 명이 희생하게 되더라도 북한군의 탱크가 한강을 넘어서는 것을 저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채병덕이 계속 반대하자 그는 즉각 지프차에 실려 한강 너머로 보내졌다. 채병덕 장군의 대리인인 김백일 부장은 한강교 폭파에 동의했다.


미국인들도 항의했다. 잠에서 깬 라이트 대령은 군사고문단 월터 그린우드 2세 중령을 급히 한국군에 보내서 적 탱크가 한국군 사령부가 있는 도로상에 나타나면 다리를 폭파하겠다던 약속을 상기시켰다.......


한국군은 전시의 혼란과 문서화된 작전명령이 없어 수사에 곤란을 겪었지만 어쨌든 군법회의를 열고 다리 폭파의 방법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공병감을 처형했다. 미군사고문단의 많은 장교들과 가진 회견을 토대로 만들어진 미 육군전사는 “전술 상황을 고려하지 말라”는 구두명령이 군 내부에서 내려진 것이 아니고 민간인 국방부 차관으로부터 나왔던 것을 밝히고 있기는 하지만 책임을 한편에 전가시키고 있지는 않다.

<한국전쟁> 조셉 굴든 p101-102



4. 북한군이 호남 지방을 석권하고 있을 무렵인 7월 22, 23일 경 한통의 편지를 받은 채병덕은 이종찬을 불러 “신성모 장관한테서 편지가 왔다. 자네가 읽어 주게.”하고 부탁했다. 이종찬이 읽은 편지의 내용은 “귀관은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했다. 책임은 중하고 또한 크다. 그런데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향하고 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관은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관은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는 힐문장 비슷한 것이었다. 마지막 구절은 죽어서 잘못을 사죄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참군인 이종찬장군> 강성재 p45-46



5. 기사회생의 벅찬 감격으로 수도 수복을 눈앞에 두었던 이 시기에 무슨 까닭으로 이러한 석연치 않은 사형 집행으로 한강교 조기폭파의 인책한계를 마무리 지으려 했던가. 공정치 못하고 다분히 정치적인 처결이라는 여론이 떠들썩했던 것은 당연하다.


이에 관하여 군사재판의 법무사였던 고원증 중령은 사실심리가 소홀했음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재판이 서울시민들의 감정에 영합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작용했던 것 같다. 사실심리가 소홀했던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이 재판을 빨리 끝내라고 호통 치던 일이 생각난다. 전시이고 국방경비법에 의한 단심제 군재(軍裁)인 관계로 공정한 재판을 기하기 힘든 시점이었다. 그리고 최창식 대령의 법정태도는 매우 떳떳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증언대로라면 최창식 대령의 처형은 조기폭파를 비난하는 국민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재판이었다는 인상을 배제할 수 없다.

<전환기의 내막>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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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0/09/16 17:3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금성천 2010/09/17 10:00 #

    TV 드라마에서는 김성원(채병덕)씨가 뿔테 안경 쓴 노주현(정일권)씨에게 "정군! 정말 잘 와주었어."하던게 기억나네요.

    고인이 된 손창호씨가 채병덕역을 한 드라마도 있었는데 평소의 이미지와 다르게 너무 무게를 잡으며 연기해서 웃으면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KBS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는 20년 전 것보다도 훨씬 못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내용도 오히려 부실하고 음악도 청승맞고.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하기 위해서였다면 20부작 정도로 만들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미연시의REAL 2010/09/16 22:42 # 답글

    흑막은 신성모라는 의혹적 결론이 짙어지는 셈이군요.
  • 금성천 2010/09/17 10:06 #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창식 공병감의 재판은 최창식 채병덕 선에서 희생양을 만들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 비도승우 2010/09/21 23:16 # 삭제 답글

    제가 태어나기 훨씬전에 작고하셔서 확실한 소속은 몰라도 친할아버지께서

    한국전쟁당시 헌병장교셨습니다.(대위로 기억)참고로 평산신씨라서 신익희씨와도 친분이 계셨는데

    아버지께 전해들은 기억에 "한강다리 끊으라는 놈들은 다 잘살고 있다" 라는 말씀을 하셨던걸 어릴때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당시에도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 다 아는 "불문의 사실" 이었고

    fat 채 소장은 죽었고 최창식 대령이 독박쓴거죠. 이건 보나마나 정말 안봐도 뻔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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