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본 인사국장이 본 한강교 폭파사건 한국전쟁

 

인사국장실 책상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27일 오전 2시경 부하 장교로부터 적 전차가 창경원까지 침입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작전국장에게 적 전차에 대한 대책을 물으니 장 국장은 지금 막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우선 서울 시내 주요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고 전차를 동반한 공산군 공격에 대비하라는 작명을 하달했다고 했다.


적이 눈앞에 와 있는데 육군 수뇌가 이렇게 자리에 앉아만 있어서야 되겠느냐고 따지자 장 국장은 육본 자체 방어 대책으로 삼각지 부근 도로를 차단하여 적 전차의 전진을 저지하는 작업이라도 하자고 했다. 그때 우리는 그 정도로 미숙했다. 나도 인사국 장병들을 인솔해서 삼각지 부근에서 남하하는 차량을 정지시켜 도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육본에 돌아가 보니 본부 건물 앞에 지프 한 대가 서있었고 채 참모총장, 김백일 부장, 장창국, 강문봉, 양국진 등 여러 참모의 모습이 보였다. 김백일 부장은 빨리 참모총장을 모시고 시흥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다른 참모들이 이곳에 남아있는데 나만 갈 수 없다고 했더니 인사국장은 있으나마나 하니 빨리 참모총장을 모시고 떠나라며 나를 밀어 지프에 태우는 것이었다. 채 참모총장은 김백일 참모부장에게 전방 아군 병력을 최대한 남쪽으로 도강시킨 후 직접 명령해서 한강교를 끊으라고 지시했다. 그 이상 더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참모총장을 태운 지프는 용산 육군본부 청사를 떠났다.


사실상 적 전차가 서울 시내에 진입한 상황에서 육군본부가 국지방어 정도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니 후일 회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미 고문단이 평했듯이 우리 모두 전쟁 경험이 없고 평소 교육이 불충분했던 것이다.


육군 간부들의 이 같은 융통성 없는 사고는 평소 미 고문관들이 남한의 방어는 서울 확보가 최후 목표라고 주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우리의 미숙함을 미 고문단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용산 대로를 완전히 메운 피난 인파와 민간 차량에 묻혀 나는 채 참모총장을 모시고 시흥으로 향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망하는구나. 한강을 건너 남하한다 해도 어디까지 갈 것이냐. 적의 공격을 피하다 잡혀 죽는 것 보다 차라리 서울 시민과 같이 싸우다 죽는 것이 군인으로서 명예스러운 일이 아닌가.”하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채 참모총장께 이런 생각을 말씀드리면서 참모총장의 결심을 촉구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를 태운 차는 한강교 북단을 통과하고 있었다. 공병들이 폭약을 장치하고 폭파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옆에 앉은 참모총장 전속 부관은 병참병과의 장 대위였다. 장 대위는 “인사국장님.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두세요. 지금 시흥으로 가기로 되어 있는데 무슨 말입니까?”하고 항변했다. 하지만 나는 “이 중대한 순간에 군인들은 명예로운 길을 택했다라는 역사라도 남겨야 됩니다.”라고 재차 건의 했더니 채 장군은 결심한 듯 차를 돌리라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운전기사가 도저히 돌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홍수 같이 밀려드는 인파와 차량의 물결 속에서 운전기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차는 한강교 남단에 도달했다. 그 곳에서도 공병들이 폭파장치를 하고 대기 상태에 있었다. 노량진을 지나 영등포 로터리를 도는 순간 뒤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시흥 보병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었으나 이미 교환실에는 한 명의 교환수도 남아있지 않은 듯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실상 육군 총사령관 격인 참모총장과 예하부대의 통신은 두절되고 소지한 휴대 통신도 전무한 절망적 상태에 놓인 것이었다.



그 후 신문을 통해 한강교 폭파 책임 문제로 당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받고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는 이미 채병덕 전 참모총장이 후방부대 사령관으로 하동 전투에서 전사한 뒤였다.


최 공병감은 채 참모총장이 자신이 한강교를 건너가면 폭파하라고 해서 명령에 복종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또 몇몇 증인들도 그런 증언을 했다. 채 참모총장이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수행했던 나로서는 그와 같은 대화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최 공병감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변론 기술상 그런 점을 강조한 것으로 추측되나 이 세상에 기록된 문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한다.


재판 도중 만일 그런 중요한 쟁점을 규명할 의사가 있었더라면 최소한 그 당시 참모총장 차에 동승한 사람들의 증언을 받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전쟁 중에 일선에 있는 증인을 소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재판 과정에서 사실이야 어떻든 간에 최 공병감에게 상당히 유리한 증언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강교 폭파의 책임을 공병감에게 추궁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가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폭파하기 전에 한강교를 건너 남하하려는 민간인들을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었으며 적 전차가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한 상태이고 육군참모총장이 한강을 건넌다는 긴급한 상황에서 부득이 민간인의 희생을 각오하고 한강교를 폭파할 수밖에 없었던 군사적인 측면이 정치적인 고려에 파묻혀버린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정부 자체가 100만 명의 서울 시민에게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버린 상황에서 최창식 공병감에게만 책임을 추궁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나를 되새기면서 나는 최 공병감에 대한 총살형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또 군의 임무 수행중의 결과로 나타난  군사적인 측면은 무시하고 정치적인 책임 전가를 위해 결론을 도출하는 사례가 군인들의 반정치 감정을 유발하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강영훈(당시 육본 인사국장) p138-139, 153-154



아울러서 생각해 볼 문제들


1. 북한군 전차들이 1950년 6월 28일 01시경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당신이 북한군 지휘관이라면 전차로 하여금 다음 중 어느 곳을 가장 먼저 점령하도록 명령하겠는가?


1)경무대(청와대)  2)방송국  3)교도소  4)한강교  5)중앙청  6)전신국



2. 북한군 전차들이 6월 28일 01시경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이 전차들이 한강교에 도달할 것으로 보이는 시간은? (단, 서울 시내에서 전차를 상대할 국군의 조직적 저항은 거의 없다.)


1) 1-2시간  2) 2-4시간  3) 4-6시간  4) 6-8시간   5) 8-10시간


덧글

  • 미연시의REAL 2010/09/20 18:58 # 답글

    1.답은 기갑부대 지휘관이라면 한강교죠.. 최소한 기동의 기본원칙을 준수한다면 하천이라는 장애물이라는 기동의 제약을 받는 문제를 최소화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강교의 제압을 필수적으로 봐야겠지요. 자신의 기갑전력을 제외하고 공병전력의 문제점을 파악하고있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하지만 보병 지휘관이라면 중앙청이나 경무대겠죠. 기본적으로 도시점령의 상징성이 부여되는 만큼 서울점령을 안정적으로 하는 방향이 우선이라면 그편이 낫겠죠. 물론 명예적인 문제도 포함되고요.

    정치장교 입장이라면 방송국-전신국이 먼저겠죠. 정치선전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어차피 도시점령에서 핵심적 위치사항 문제로서는 당시 북한군에게는 1차적인 목적인 서울이라는 작전한계점을 고수한 점을 고려한다면.. 한강교는 기갑부대 입장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아닌 문제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 미연시의REAL 2010/09/20 19:03 #

    2의 문제의 답은 2번이라 생각합니다.(늦어도 말이죠.) 아무리 기동부대인 기갑부대를 분산운용한 북한군이라 할지라도 동아시아에서 그래도 나름 현대화되었다고 평가되는 당시 전쟁초기 북한군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시가전에 대한 경계를 한다고해도 늦어도 4시간내라 생각되네요.
  • 슈타인호프 2010/09/20 22:59 #

    방송국은 이미 인민군 특작부대가 점령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쪽은 보기에서 빠져야 할 듯.
  • 행인1 2010/09/20 19:08 # 답글

    "정부 자체가 100만 명의 서울 시민에게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못하고 떠나버린 상황에서 최창식 공병감에게만 책임을 추궁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나..."

    문장의 의미가 굉장히 무겁게 다가오네요...
  • 슈타인호프 2010/09/20 23:04 # 답글

    다른 도시라면, 제가 지휘관일 경우 당연히 한강교를 최우선적으로 점령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곳이 아닌 수도 서울이라는 점에서...이승만 대통령의 탈출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일단 경무대로 치고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요. 미아리에서 경무대부터 들렀다가 한강으로 간다고 해도 곧바로 가는 길에서 그렇게 많이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또한 전차가 서울 시내에 진입한 시각이 한밤중인데다 지리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시내에 국군이 어떤 준비를 해놓았는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보병 지원도 없이 그대로 내달리기는 솔직히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인민군 전차대도 밤중에는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돌아다니기만 했고요.
  • 산중암자 2010/09/21 21:03 # 답글

    1. 1950년 당시의 북한군 지휘관이라면....음, 경무대 거쳐서 한강교일테니 전 경무대쪽에 한표 걸겠습니다.

    대통령이 있든없든 경무대의 상징성이라면 북한군처럼 "정치적" 군대의 제1목표가 되기 충분할듯 합니다. 경무대에서 한강교가 당시 도로사정으로도 그리 먼것도 아니고 국군의 반격준비가 어떨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기갑부대만으로 불확실한 시가전 상황(게다가 민간인으로 이미 넘쳐나는 상황)으로 전차대를 몰아붙히고 싶은 마음은 안듭니다.

    써놓고 보니 호프님과 의견이 비슷하네요.
  • 비도승우 2010/09/21 23:03 # 삭제 답글

    한국전쟁당시 미군지휘관들 이나 고문관들의 공통된 초기북한군의 전투방식은

    보전협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전차가 일단 지나가고 한참후에야 보병들이 북적거리며 따라왔다"라는 식의 표현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실제로 영천전투에서 변규영소위의 특공조가 전차 5대를 잡을때도 보병지원없이 14대의 전차가 일렬종대로

    야간에 기동했습니다.

    실제역사에서는 적전차가 서울진입후 야간에 별다른 전과를 올리진 못했죠.

    그러나" 기동 그자체"로 이미 국군에게는 "공포"였습니다.

  • 비도승우 2010/09/21 23:07 # 삭제 답글

    아무튼 1950년의 북한군 지휘관이라는 가상설정으로 돌아온다면

    일단 초전에 전차덕분에 짭잘한맛을 보았고 미군고문관들의 표현처럼

    보전협동도 미숙한시기였다는 팩트를 덧붙였을때 제가지휘관이었다해도

    서울시내 곳곳에 전차를 조별로 단독혹은 2~3대1개조같은 형태로 "풀어놓았을"것이고

    지금의 기준으로보면 한강교부터 장악하여 국군의 후퇴자체를 봉쇄하고 인민군의 수월한

    2단계남하작전을 위해 교량을 온전히 보호하게 하겠으나 1950년 신생 북한의 20대후반30대초반의

  • 비도승우 2010/09/21 23:11 # 삭제 답글

    "중대장"급 경력과 안목을 가진 "여단장" 이라면 경무대를 일차타겟으로 선정할거 같습니다.

    더군다나 공산국가 군대자체가 상당히 "정치적이슈"를 중시한다는 측면에서는 더욱 그렇네요.

    일단 경무대에 인공기 꽂고 그 다음에 방송국 (이미 확보안된상태라는가정) 중앙청- 교도소-한강교

    수순일거 같습니다. 물론 저라면 최대한 리얼타임 동시확보를 명령하겠지만 1950년도 20대후반

    30대초반 사회주의 신생국가의 책임장교 기준으로는 이럴것같습니다.
  • 금성천 2010/09/29 18:00 # 답글

    고견들을 올려주신데 대해 감사드리며 답글을 일찍 달지 못해 죄송합니다.

    28일 01시경 미아리 고개를 넘은 북한군 전차가 제대로 준비하고 마음만 먹었다면 삼선교 혜화동 안국동 중앙청(경무대) 시청 남대문 서울역 용산 삼각지를 거쳐 한강교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사실 1-2시간일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수유리에서 20번(아륙운수) 버스를 타면 신일고 미아삼거리 미아리고개 돈암동 삼선교 혜화동 안국동 중앙청까지 35분 걸리더군요. 지금은 얼마나 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02시 30분에 한강교를 폭파한 것이 너무 성급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당시의 급박함을 모르는 후세 사람의 오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비도승우 2010/10/07 16:47 # 삭제 답글

    20세기후반이나 21세기기준으로 반세기전을 재단하는 어리석음이죠.

    분명히 당시 한강교폭파는 책임자처벌문제에서 잘못이고 무엇보다 먼저 다리위의 민간인살상부분이

    제일큰 과오이나 그만큼 급박했다는것이 눈에훤히 보이는듯합니다.

    하다못해 3.5인치 슈포바주카로도 있었다면 교량주변에 대전차 저격조를 포진/매복시키고 헌병통제하에

    민간인및아군 철수통제를 통해 나름 질서있는 후퇴와 폭파가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역시도 지금의 기준이며 만약 다리위로 밀려오는 민간인중 적 편의대가 위장침투할 우려도 있으니

    정말 저라도 난감하고 눈앞이 캄캄할것 같습니다.

  • 비도승우 2010/10/07 16:51 # 삭제 답글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그래서 한강에 다리를 많이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한국전쟁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읺으려구요. 강북이남지역의 증원군을 다방면으로 신속하게

    여러교량을 통해 지원받고 민간인을 최대한 빨리 철수시키기 위한 일환도 교량건설에 포함됐었다는 에피소드요.

    역사를 통헤 배우고 느끼고 다시는 저런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준비를 하는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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