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초기 부하들 곁을 세 번 떠난 연대장 한국전쟁

 

6월 25일 17.00쯤 북괴군의 공격 준비사격이 개시되고 빗속에서 전차 7-8대를 앞세운 북괴군의 기갑부대-전차, 자주포, 장갑차, 차량, 사이드카 등 150여대가 3연대 방어정면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송우리 마을 삼거리 부근에 배치된 연대 57밀리 대전차포 3문이 포문을 열고 선두 전차에 포탄을 명중시켰으나 철갑탄이 아닌 고폭탄이어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3중대 소대장 김학석 중위는 2.36인치 로켓포반에 사격하도록 독촉하였지만 사수가 당황하여 우물거리는 사이에 매복지점이 노출되고 오히려 북괴군 전차로부터 기관총 사격을 받게 되어 숲속으로 피신하고 말았다. 그때 확인된 북괴군 선두 전차의 번호는 701이었다.


연대 방어진지에 배치된 장병들은 북괴군 전차의 출현으로 동요하기 시작하여 사격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는데 11중대장 이봉근 중위가 지휘하는 2.36인치 로켓포반이 포탄 2-3발을 발사하여 북괴군 전차에 명중시켰다. 그 전차는 로켓탄에 맞아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직후 길 옆 배수구에 비스듬히 빠져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때부터 북괴군 전차와 자주포 및 장갑차들은 3연대 진지에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호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3연대 병력 중에는 지휘관의 명령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철수하는 병사들이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 위급한 시기에 연대 관측소에 있어야할 연대장 L중령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대대 전술훈련까지 끝마치고 정예부대로 자부하던 3연대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출동 전에 실시된 혼성 편성으로 인한 지휘체계의 문란과 지휘관의 행방이 묘연해진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북괴군 보병과 교전하기 이전에 분산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 3연대는 출동할 때 개인에게 지급된 반기수의 실탄(60발)조차도 소모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상태에서 방어진지가 붕괴되었던 것이다.


도저히 방어진지를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한 3대대장(김봉상 소령)은 연대장을 대신하여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리하여 1대대는 43번 도로 동쪽에서, 3대대는 그 서쪽에서 각각 의정부를 목표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날 20.00 1대대장이 축석령에서 수습한 연대 병력은 겨우 150여명이었다. 나머지 병력들은 창동, 의정부, 태릉 등지로 흩어졌으며 연대는 사실상 전투력이 와해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한국전쟁 전투사 38도선 초기전투 서부전선편> p73-75




전날 송우리에서 분산된 3연대는 1대대장의 피나는 활약으로 일부 병력이 수습되었으며 7사단은 그 병력을 26일 아침 155고지(금오동 남쪽 1킬로미터)에 배치하였다.


3연대는 의정부가 북괴군 수중에 떨어진 이후에도 이 고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연대장이 “보급을 추진해 줄 것이니 별명이 있을 때까지 이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남기고 방어진지에서 떠난 이후 아무 소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연대장도 되돌아오지 않으므로 다시 대대별로 분산철수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전투사 38도선 초기전투 서부전선편> p93




2사단의 축석령 방어는 5연대와 16연대가 병력을 집중 운용하지 못하고 축차로 투입한 관계로 적의 월등한 화력 및 기습공격으로 초기에 퇴로가 차단되거나 분산되었다. 이에 연대는 전투다운 전투를 한 번도 못하고 의정부 동북쪽의 관문을 내놓게 되었다.


2사단장은 금오동에 위치한 사단 지휘소가 위기에 처하자 자일동 서북쪽의 202고지-금곡 선에서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간 병력 장비 탄약의 부족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혼선만 빚고 있었다.


3연대장 L중령은 친형인 사단장을 찾아와 현재 연대 병력의 일부가 155고지에 배치되었다고 보고하면서 역습명령을 내려달라고 상황에 전혀 맞지 않은 건의를 하였다. 

<6.25전쟁사 2권> p374-375




우리 대대는 6월 25일 밤에 의정부 부근의 금오동에서 광릉으로 철수하였는데 26일 새벽 05.00에 광릉에 집결해보니 적이 벌써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그래서 나는 대대를 이끌고 마석우리쪽으로 빠졌다.


26일 17.00쯤 마석우리에 도착해서 주민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1개조를 정찰을 내보냈더니 작전장교인 황삼주 중위가 실종되었다. 정찰조가 나간 거리를 측정해 본즉 적이 이미 마석우리 부근까지 진출한 듯 했다. 그래서 야간행군으로 북한강으로 나가 배 2척을 구하여 30명씩 분승, 철야로 도하를 해서 양수리로 철수했다. 28일 새벽에 천호동쪽으로 오니 그곳의 광진교를 폭파하고 난 공병 몇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비로소 서울의 상황을 알게 되어 공병의 차량으로 수원으로 집결하였는데 수원에 도착한 것이 17.00이었다.


강문봉 대령을 만났더니 나더러 빨리 과천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탄약 수송차에 편승해서 안양으로 가서 도보로 과천에 갔다. 과천에 가니 3연대 일부 병력이 집결해 있었다. 이어 보병학교의 교도대 병력이 증원되었다.


29일 아침에 연대장 L중령이 아프다고 하여 수원으로 가고 부연대장 최수창 중령이 연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최 중령은 보병학교에서 전술 교관을 하던 분으로서 “대한민국 육군 가운데 전술에는 나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스스로 호언할 만큼 우수한 사람이었다.


연대는 과천 지역을 보병학교부대에 일임하고 말죽거리 정면을 맡았다. 한강선은 적에 감제가 되므로 강변에서 4 킬로미터 남쪽의 고지에 진지를 점령했다. 거기서 적이 도강해서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우리가 오히려 공격을 함으로써 백사장 쪽으로 적을 밀어붙이고 76밀리 포 5문을 노획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철수해서 사단장 이한림 대령의 명령에 따라 과천 남쪽에 예비진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안양 쪽에서 적의 전차가 군포장을 지나게 되었으므로 우리도 판교 쪽으로 철수하다가 사기막골(서판교 운중동 서쪽) 부근에서 철수로를 개척하던 연대장 대리 최수창 중령이 저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게 되었는데 적이 우리의 앞길을 막았던 탓으로 그곳에서 분산되고 말았다. 연대장은 미처 후송을 하지 못해서 그곳에서 운명하게 된 것인데 후송만 했더라면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 참으로 아까운 분이었다.

<한국전쟁사 3권> p761-762 3연대 1대대장 임백진 소령





덧글

  • 비도승우 2010/10/15 16:43 # 삭제 답글

    저는 수기사를 제대하여 군생활하던곳이 포천이었는데 부대앞에 바로 43번국도가 지나고있어서

    이번 금성천님의 글에서 눈에보이는듯한 경험을 했네요^^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L 중령이라는 작자가 궁금해지네요..아무리 신생공화국의초창기 군대라고는하지만

    연대장까지 수시로 도망을 다니다니..좀 멍해지는군요.
  • 금성천 2010/10/15 17:40 #

    결국은 지뢰사고로 전사했습니다.
  • 행인1 2010/10/15 23:59 # 답글

    그저 정신이 멍해지는 이야기로군요.-_-
  • 비도승우 2010/10/16 00:20 # 삭제 답글

    결국은 지뢰사고라니..안습이군요.이순신장군의 "생즉필사 사즉필생" 이 맞는말씀 같습니다.

    자꾸 도망이나 다니니 이동중 변수(?)가 늘어나서 결국 지뢰를 밟은것은 아닌지..--"

    부하보기가 민망하지는 않았을지..정말 부끄러워서라도 저리는 못할텐데 하는 생각이듭니다.

  • 금성천 2010/10/16 09:45 # 답글

    놀라운 것은 저 분을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정말 멍해지지 않을 수 없죠.
  • 비도승우 2010/10/16 18:34 # 삭제 답글

    한번 다시 "멍"때리게 되는 내용이네요..

    현재의 한국군 지휘관 중에는 저럴인물이 없길 바랄뿐입니다.

    L 중령..웬지 아군지뢰를 밟았을듯한 냄새도 나네요..아무튼 이런 숨겨진 비리들을 많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두고두고 교육되어야할 지료들입니다. 육사나 3사에서 이런거 정신교육시간때 가르치는지나 모르겠네요.

    북한은 입대5년차병사중에서 장교뽑는다는데..그러지는 못할망정 정신과 사상무장은 제대로 되야할텐데..

    군생활하면서 본 육사장교는 거의 특권의식에 젖어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케이스들을 주로 보아온터라..

    (훌륭한 전임대대장과 전차대대장도 물론 보았음)아무튼 즐거운 주말되세요^^
  • 금성천 2010/10/17 00:47 #

    5일 동안 세 번이나 부하들을 버리고 내뺄 사람이 왜 군에 입대했는지 참 이해하기가 힘들죠. 간혹 6.25 다큐에 수유리에서 전사한 1연대장 함준호 대령의 마지막 동영상을 볼 때 그 힘들어 하는 표정과 이 L중령의 추태를 대비해 봅니다.
  • 비도승우 2010/10/17 18:41 # 삭제 답글

    함준호대령이나 김용배,전성호대령같은 작전중 장렬히 전사한

    안타까운 지휘관들도 많이계시지만..참으로 L 중령..누구인지..궁금하네요.

    앞으로도 저런 일반에 밝혀지지않은 마이너한 자료들 많이 부탁드립니다.

    저런 지휘관들이 평시에는 엄정하게 군기잡고 온갖 위세는 다부렸겠죠..

    차라리 후방의 신병훈련소나 지원시설에 보직되었다면 개인에게는 행운(?)이었을 듯합니다.

    반짝반짝하게 군화광내고 칼줄내서 군복다려입고 빈권총차고 지휘봉들고 훈시나하고

    검열 및 군기 잡는데는 저런인물이 딱 이니까(?)말이죠.

    앞으로는 어떤 자료들이이 많은 깨우침을 주실지 기대하겠습니다.



  • 변성고검 2010/10/18 01:13 # 삭제 답글

    선생님의 글을 읽고나서 생각한 것이 있답니다. 연대장 내지 부연대장 전사라면 부대의 분산철수 내지 비야냥의 어투의 녹았다라는 증언글을. 제가 읽은 장창국 장군의 '육사졸업생' 이라는 글에서 수도사단 C.P 급습을 맞아 사단사령부의 탈출이 기억나는데, 군맥과 인맥이라는 점에서 왜 송요찬 장군이 그를 참모장으로 썼는지 궁금해지네요.

    헌병사령관 출신의 송장군의 물갈이 였을까? 엉뚱한 의문이 드네요.
  • 금성천 2010/10/18 10:27 #

    변성고검님. 저 선생님 아니라니까요. 수도사단 CP 피습은 송요찬 장군으로서는 상당히 치욕적인 사건인데 그 부분의 참모장의 인맥 군맥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군요. 다시 한번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금성천 2010/10/19 11:59 #

    변성고검님. 제가 좀 혼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수도사단지휘소 피습사건이 10월 이후인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9월 4일이었군요. 사단장은 남쪽으로, L참모장은 북쪽으로 피신하고......
    그런데 수도사단 참모장 계보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네요. 최경록-L인지, 최경록-???-L인지?
  • 변성고검 2010/10/26 00:43 # 삭제

    한국전쟁 당시 활약했던 장군님들 자서전들 떠올려보면 희안하게 참모장 no, 일선연대장 ok 이런류의 회상들이
    겹치더군요. 보직관리 측면이라고 친다면 참모장<연대장 이라는 공식일텐데, 부하버린 L연대장의 참모장부임은
    송장군의 은혜갚기(? 50년 전쟁이전의 은공)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댓글을 올려봤습니다.

    참모장을 전투서열에서 볼 수 있다면 인맥과 군맥관계를 더욱 잘 볼수 있을텐데 금성천님(으윽 선생니~ㅁ^^)께서
    말씀하신 최-이후의 순서는 볼수가 없네요. 다만, 한국군으로의 전쟁사를 바라볼때 능력위주+기수밀림 능력딸림+기수우위의 인사관계도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들을 따르는 사병들의 피해는 좀더 줄지 않았을까 싶네요.

    생각의 모멘은 지원병출신의 기수늦은 지원병출신의 이용장군과 특임출신의 김동수 장군이랍니다.

  • 금성천 2010/10/26 12:46 #

    송요찬과 L과의 인연은 특별히 기억나는게 없군요. 어떤 은혜 갚을 일이 있었죠? 궁금해지네요.

    속사리에서 밤마다 대대장 중대장 연대참모들 모아놓고 화투판 벌이다 부대 녹인 광복군 출신 연대장과 설악산에서 후퇴시 부대 최후미에서 포사격 유도하며 내려온 만주군 출신 연대장이 있었죠.
  • Dr.Nam 2010/10/21 16:02 # 삭제 답글

    형이 사단장인 7사단 3연대장은 이상근 대령이군요.

    당시 2사단장이 병력 축차 투입을 끝까지 막지 않은 이유가 동생이 지키고 있는 포천방면의
    3연대 지원을 동생이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요.
  • 변성고검 2010/10/26 01:21 # 삭제 답글

    50년 전쟁발발이전의 38선 분쟁에 대한 글(양영조님과 60년대 한국전쟁사1권)을 읽고나서 김백일장군의 지대한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봤답니다.
    여순반란-- 김백일장군 up --- 유격전전술로 명성얻음
    강표월북-- 6여단장 김백일장군 down ---
    옹진전투-- 김백일장군 명예회복기회(축차투입 전술 사용) 실패??
    동란발발-- 실질적인 육본 책임자(??)

    김장군의 전술은 대전초기 한국군 전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믿고싶네요. 아무리 승진이 빨라도 육사1기생은 중령이
    최고계급이었을꺼라 생각되네요.




  • 변성고검 2010/11/01 04:06 # 삭제 답글

    송장군이 8사단 10연대장 시절 기사문리 포격으로 절대 (+)를 얻었다고 생각되지 않네요. 승진에 영향 미치는 미고문단에서는 갓뎀 소리를 들었을 꺼라 생각되고요. 그분의 실력으로 얻게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꺼라 생각이 드네요.

    부사단장이라는 직제가 한국전쟁 어느시기에 만들어 진것인지 궁금하고, 그 직제가 송장군이 사단장되기전에 있었던 것이라면 한국전사에서 강한 임펙트를 보여주는 송장군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만군, 일군 출신을 떠나서 강한 군인의 모습은 설득력이 있었을까 생각되고, 군맥으로 봤을때 송장군은 일군계열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금성천 2010/11/01 16:15 #

    서로 이야기한 핀트가 살짝 어긋나서 선문답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용장군 말씀하시길래 설악산 전투에서 포사격 유도하며 내려온 기갑연대장 시절의 이용장군 이야기 한 것입니다.
  • 변성고검 2010/11/02 02:34 # 삭제 답글

    에공 금성천님이 알려주신 안용현님 글 본지가 오래되서 생각을 못했답니다. 설악산 전투관련글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다시 취미를 찾게해주신 금성천님에게 새삼 감사드립니다^^
  • 금성천 2010/11/02 11:58 #

    설악산 이용장군 일화는 <번개부대의 6.25혈전기 독립기갑연대사>에 있습니다.
  • 리산 2011/05/04 19:37 # 삭제 답글

    6.25전쟁사 2권이라면 어떤 책인가요 ? 궁금합니다.^^
    요즘 명성출판사의 한국전쟁에 푹 빠진 친구입니다.
    thematour@hanmail.net 로 답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 금성천 2011/07/08 12:50 #

    너무 늦게 리산님 댓글을 봐서 미안합니다. 오늘에서야 보았네요. 전쟁기념관 기념품 매장에서 판매하는 있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행의 6.25 공식 전쟁사입니다. 현재 7권까지 나왔는데 가격은 권당 22000-25000정도 합니다.

    명성출판사 한국전쟁도 좋은 책이죠.
  • 초딩 2011/07/08 18:59 # 삭제 답글

    6/25초전 의정부지역의 지휘관 요원은 비교적 계급도 높고 그 출신이 고위층 자제/사위(일명 갑사;이때까지도 양반/상놈시대였으니까) 그래서 부자간 사단장(아들이 아버지앞에서는 어떤 처신을 했을까?ㅎㅎ) 장인/사위 사단장등을 보면 로얄 페밀리
    맞죠?
    6/25때 어느 참전국의 황태자나 미국의 상당수 장군의 아들들이 참전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우리는 임진란이나 6.25에서
    반대의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지금도 정치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생겼다고 생각됩니다.

    갑자기 최석장군이 생각나네요.
  • 금성천 2011/07/09 13:42 #

    그러고 보니 의정부 전투 주요 지휘관은 군인 가족이 많군요. 채병덕 총장은 일본 육사 27기 백홍석장군의 사위, 유재흥장군은 일본 육사 26기 유승열장군의 아들, 이형근장군은 일본 육사 26기 이응준 장군의 사위, 3연대장 이상근중령은 이형근 장군의 동생.
  • 박용수 2011/07/10 20:49 # 삭제

    그런데 정치인 낙하산이 고위급으로 참전하는 것과 군인가족 출신이 고위급이 되어 참전하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정치인 낙하산이야 최석장군 이야기처럼 실력도 없는 사람이 명성만 얻으려고 한 사례고, 군인가족 출신이 참전하는 것은 적어도 군대 전통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참전하는 이야기일 테니까요...

    미국 남북전쟁때도 비전문 낙하산들, 일명 patronage에 의한 인원들이 많이 남군 정규군 및 북군 민병대 쪽에 들어와서 곤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 원문: (http://www.cgsc.edu/carl/resources/csi/griffin/griffin.asp) / 번역글: (http://cafe.daum.net/GermanY/RVG0/3) ]
  • 2011/07/11 09:49 # 삭제 답글

    6.25에서 미군 고위급(장군이상) 아들들이 참전해서 전투기 조종사 등의 위험도가 높은 직책에서 분투/전사가
    많은 건 독립전쟁.남북전쟁을 겪으면서 전쟁 무공자가 국가 최고의 영웅대접을 받는 전통문화가 정착되었는데 비해서

    우리나라는,사단장이상은 한말의 양반신분이 계승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일 26기 정도는 한말 무관학교 입학정도의 무관 신분세습이 이루어졌고 상당한 학력도 로얄계층의 바탕에서 이루진건
    틀림없고요.그렇다면 2세 또는 사위도 신분계승이 맞습니다.학계에서 이병도.정치인도 많습니다.

    문제는 2세대의 군인은 어떤 신념을 가졌는가가 관건인데...
    최석이 현리에서 여자와 생활했다는 사례에서 추측컨데,일본군의 충심성에서 보는 할복정신도 보기어렵고
    미군의 딘소장처럼 최후 결전장에서 임무완수하는 정신력도 보기 힘듭니다.

    단지 주어진 권한에서 임무부여에 충실했고 즉결처분이 쉬운 전형적인 양반권위 풍습이 군에도 존재했다면
    너무 비약적인가요?그들은 찦차가 없으면 지게도 타는 신분입니다.
    현리 후퇴에서 최석이 부하에게 한 말씀" 니놈은 머슴출신이라서 먹는 거 무지 챙기네..."이랬을거 같은데...
    웃자고 글쓰면서도 한숨만 터져 나옵니다.
  • 2011/07/12 10:02 # 삭제 답글

    윗글의 주제 'L대령(연대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조심하려는데
    갑자기 '유동열 통위부장의 김종갑 출신성분...'글이 눈에 띄네요.

    창군초기에 신분검색의 우선순위는 1)친일전력 2)좌익사상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통위부장이라는 사람이 양반/상놈을 논했다니...

    왜정과 6.25에서 살아난 대한민국이 불가사의!!!
  • 2011/07/12 10:11 # 삭제 답글

    하긴 이승만도 전주이씨 조선왕조를 계승한 군주의 인식하 영친왕등 왕족을 견제했다는 견해도 있고
    '74년 육영수여사 저격사건때도 국모님 사망이라고 했으니,
    그 시절의 사회상을 짐직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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