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만주에서의 우리 민족 좌익과 우익의 군대 양성 한국전쟁


일제 패망 후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계열 지도자들은 38선을 철폐하고 통일 독립국가를 건국하기 위해서는 수백만 동포가 거주하고 있고 중공의 팔로군이 점령하고 있는 중국 동북지방 만주에서 조선 혁명역량을 키우고 나아가 동북의 조선 혁명가들이 전체 한반도의 혁명운동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주장의 밑바탕에는 미군이 점령한 남한이나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은 한반도 혁명의 근거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조선 청년들을 군사적으로 단련시키고 이들을 동원해 남북통일을 이루겠다는 전략을 지니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선봉에는 10개 연대의 만주 조선인 연대가 있었다.



김구, 이청천, 조소앙등이 통합해 만든 한독당(한국독립당)은 광복군 확군을 위해 해방 직후부터 국민정부에 일본군 소속 한적 사병의 인도를 요청했다. 김구는 장개석에게 보낸 전후 수습책 제 5항에서 한적 사병을 우리에게 넘겨 광복군이 이들을 편성 훈련해 건국 시기의 기간대오로 만들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한독당이 확군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던 이들은 중국 관내지방의 일본군 소속 한적 장병들이었다. 비교적 높은 학력과 건강한 신체를 지녔으며 정규 군사훈련까지 받은 이들의 군사 정치 인재로서의 유용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국내에서 쓸 만한 장정은 학병 혹은 지원병으로 끌려간 사람들이라는 한독당 조직부장 출신 조경한의 언급은 아마 당시 한독당 간부 일반의 인식이었을 것이다. 한적 장병 출신들이 특히 5.16 이후 남한 사회의 정치, 행정, 군사, 학술, 예술, 종교 등 각 방면에서 수행한 역할을 고찰해보면 한독당 간부들의 인식은 매우 일리가 있었다. 


광복군 지대장이었던 김학규는 만주에서 중국 중앙정권이 튼튼히 서 있고 그에 의하여 우리 한인의 민주세력이 다소라도 있다고 하면 북한 적색괴뢰집단은 남한 민주세력과 만주 민주세력의 협공감제(挾攻瞰制)하에서 꼼짝 못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1947년 2월 20일 김구는 심양의 김학규에게 “중앙군의 양해하에 동북에 한교 자위군을 조직하여 중공과 조선의용군을 근본적으로 궤멸함이 한중의 영구한 행복이 될 것이다”라는 요지의 격려답신을 보냈다.


안재홍은 장개석에게 보낸 편지에서 소련이 북한에 진주한 이래 38선 이북의 국토는 완전히 공산당의 독재하에 빠지고 공산당은 계속 남한 적화를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만주의 중공군과 북한이 밀접히 서로 연계해 활동하고 있음을 말하고 최근 남한 애국청년들이 조직한 단체들로 하여금 중공 소속 북한 공산군 박멸에 협조하게 하여 국민정부가 베푼 그간의 원조에 보답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금일 중공에 가입하고 있는 조선인 공산군 세력은 한국에서 공산혁명의 전위부대가 될 것을 몽상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애국청년을 파견하여 중국에서 훈련을 받아 정예부대가 되어 한국 내란이 발생할 때를 대비하고 만주 백만 한교를 적색 마수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일조하겠다고 했다. 애국청년단은 대동청년단(이청천), 민족청년단(이범석)을 말한다.


민주자위군 부총대장 박영준은 김학규 등과 상의하여 50명의 청년들을 모아 중국 성도에 있는 중앙군관학교에 보냈다. 그는 서울의 김구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머지않아 몇 개 사단을 끌고 남진할 테니 그때 남한에서도 북진을 하도록 지금부터 준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군이 패하고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에 의해 만주가 장악되자 조선인들에 대한 청산투쟁에 나선 것은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 공산주의자 들이었다. 두려움에 빠진 국민당 지구 교민들은 남한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래도 남는 사람이 더 많았다. 비행기를 타고 갈 재력이 없고 걸어서 갈 처지도 못되며 설령 귀국하더라도 별 수 없는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잔류를 선택했다. 서탑소학교 4학년 박영옥의 시는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드러나 있다.

 

비행기 비행기 조선 가는 비행기

네가 조선에 도착하거든

예뿌고 아름다운 책 한권만 사서

나에게 보내다오

우르릉 우릉 우르릉 우릉

네가 서울에 도착하거든

우리 글책 공민책 노래 도화책

한권씩만 나에게 보내주렴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래 오래 굳세게 살아나가지

東北韓報 1948.5.25 


민주자위군으로 성도에서 훈련을 마친 50명은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대만을 거쳐 귀국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때 장교 신분으로 참전했다. 28명이 희생되었고 22명만 살아남았다. 


해방 후 조선인에게 조국은 남이건 북이건 조선(한국)이었지 중국이 아니었다. 연변대학 역사 교원이었던 이수송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우리 조국이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조금치도 민족적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1957년 연변대학에서 진행된 반우파투쟁에서 연변대학 교직원 일동은 “당의 민족정책을 악독하게 공격하고 조선족 인민을 조국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가정 속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조선족 인민을 암흑한 생지옥으로 내쫓으려는 우파분자 리수송의 반동음모 궤계"라며 규탄했다. 해방 후 10년 동안에 만주의 조선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조선족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염인호 교수의 <또 하나의 한국전쟁-만주 조선인의 조국과 전쟁>


덧글

  • 미연시의REAL 2011/01/10 16:10 # 답글

    중국인의 미래관점의 만만디도 무시할수 없죠. 오늘날 조선족의 동화정책의 현실만봐도 그렇고 우리민족 자체 말살하려는 중국의 모습에서도 그렇고 말입니다. 광복군이 일본 원폭투하직후 대규모 늘어난건 알지만 저 문제를 정말 어떻게 봐야할지 의문이네요.. 저기서의 한일 구 일본군 출신에 대한 문제는 사실 여러가지 논란도 있는게 또한 현실 아니겠습니까?
  • 금성천 2011/01/10 17:31 #

    제가 옛날 중국어 배울 때 강사이신 중국인 왕모 선생께서 한국이나 베트남, 일본도 다같은 黃帝의 자손이다라고 주장하여서 쇼킹했었습니다.

    광복군이 해방 전에는 수백명 규모지만 해방 직후엔 수천명으로 늘어나죠. 광복군의 급작스런 확군에는 광복군 지도자들의 전략이나 야심도 있었고 일군 출신 광복군 지원자들의 목적은 안전한 귀국이었으니 동상이몽이라고 할까요?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의 욕심은 조선의용군의 성장과정을 좀 더 알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그 점은 약간 설명이 미흡하였고 해방 후 광복군의 실체에 대해서는 좀 더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無碍子 2011/01/10 20:34 # 답글

    일본군 패잔병을 대한민국 국군을 만들려는 한독당이 현실을 바로 봤다고 생각 합니다.
  • 금성천 2011/01/11 09:53 #

    당시로서는 드문 고등교육을 받은 학병들과 수십 대 일의 경쟁을 거쳐 선발된 지원병들은 우리 민족의 값진 자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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