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세계를 살아간 조선의 사림(士林) 조선시대

 

훈구파가 현실참여파로서 치인(治人) 즉 경국제세(經國濟世)를 위한 국가사업에 참여하는 동안 사림파는 정주(程朱)의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수기(修己)의 학문을 연마하면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확고한 지반을 구축했다.


사림파의 성리 중심의 학문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융통성이 없는 것으로서 이제까지 각 분야에 걸친 실용 중심의 학문을 위축시키고 후퇴시키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훌륭한 성리학자이고 예리한 비판자라고 해서 훌륭한 정치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정치가는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고 마실 수 있을 정도의 현실주의자라야만 한다.


사림파가 정계와 학계를 지배하게 되자 조선의 유교가 성리학 일변도로 되고 실학을 잡학으로 깎아내려 학문 내용 자체를 빈곤하게 만든 후유증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사림파가 지향한 것은 주자학 일존(一尊)의 도학정치였다. 조광조가 이상으로 삼은 것은 사상과 정치에 도학을 실현하는 것으로 부국강병은 그 다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로부터 군주가  좋아하는 것은 패도(覇道)의 공이었고 왕도(王道)를 행한 일은 드물었다. 패도로 부국강병의 효과를 이루는 일은 오히려 쉽지만 또한 어찌 인의(仁義)의 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왕도를 행하는 일은 비록 조석(朝夕)간에 효과가 보이지는 않아도 멀리 보면 크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암집(靜庵集) 제1권 원자보양관시계(元子輔養官時啓)2


1590년대에는 일본에 의한 왜란이 일어났고 1620~30년대에는 여진족에 의한 호란이 있었다. 남북으로 패권(覇權)적인 민족이 인접해 있는데 과연 인의의 도로 나라를 지키고 민중을 구할 수 있을까?


도학자들은 정치가의 주된 임무인 경세제민의 정책을 논하기보다는 인의의 도를 말하는 것을 장기로 한다. 그러나 사실 부국강병의 길은 인의를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게다가 부국강병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의 여부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말로 얼버무릴 수 없다.

<선비의 나라 한국 유학(儒學) 2천년> 강재언 p273-281


같이 읽어서 좋은 책

못난 조선  문소영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신동준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이삼성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