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초기, 전투 없이 내어준 최후저항선 축석령 한국전쟁

 

한 사람이 양의 내장(內臟)이나 개집의 문과 같이 좁은 산악지형을 방어한다면 그는 능히 천 명의 적을 저지할 수 있다.  손자병법 지형편


 

밤에 잠깐 재편성하기 위해 쉰 후 북한군 3사단은 포천 가도를 내려오고 4사단은 동두천 가도를 따라서 의정부 회랑을 향해 집중 협공을 가해왔다.


4사단은 곧 난관에 봉착했다. 한국군 7사단이 맹렬한 반격을 했고 아침에는 처참한 전투가 서쪽에서 벌어졌다. 유재흥 장군의 7사단은 후에 라디오에서 방송한 것처럼 진격 같은 것은 못했지만 적어도 적의 공격은 지연한 것이었다. 


포천 가도에 연한 7사단 동편에서 미군사고문관이 이형근 준장의 지휘소에 들어가 보니 장군은 참모들과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는 2개 대대를 의정부에서 약 2마일 북방의 가도에 배치하고 그들에게 참호를 파게하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미약한 대대의 공격은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동두천 가도에서 완강하게 싸우던 유재흥 준장은 적이 의정부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뒤가 딸린 유 장군은 공격중지를 명령했다. 7사단은 의정부 남쪽으로 후퇴했다.

<한국전쟁 This kind of war> 페렌바크 p69


H시에 유재흥 장군 휘하의 7사단은 공격을 개시했으나 이형근 장군의 2사단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장군은 사단 총 공격 명령을 받았는데 단 2개 대대로는 공격하지 않았다. 북괴군은 2사단의 우유부단과 약점을 간파하고 2사단에 집중공세를 펴 2사단을 몰아내고 7사단의 노출된 좌익을 공격하여 7사단도 후퇴시켰다.

<이승만 박사와 미국 대사관 Embassy At War> 해롤드 노블 p35-36





유리한 지형의 선택은 방어자의 특권이라고 한다. 춘천 소양강과 홍천 말고개 없는 6사단의 선전은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전쟁 전 수립된 방어계획상 포천 의정부축선의 최후저항선이자 가장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던 축석령은 이형근 2사단장의 안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조치로 적에게 그냥 내어주었다.


육본으로부터 의정부 집결을 명령받고 전쟁발발 10시간이 지난 오후 2시 대전을 출발한 2사단 5연대 2대대는 20시가 되어서야 의정부에 도착하였다. 게다가 가장 방어에 유리한 축석령은 그대로 둔 채 그 아래 내리막길인 금오동에 호를 파고 주력의 도착을 기다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식 밖의 조치였다.


지금 지나가는 고등학생 아무나 붙잡고 적군이 수유리 길음동 방면에서 혜화동 방면으로 쳐들어오고 있는데 네가 지휘관이라면 미아리고개에 병력을 배치하겠나 돈암동(성신여대역) 사거리에 호를 파고 기다리겠나 물어봐도 답이 나올것이다. 또 다시 질문하여 적군이 불광동 녹번동 방면에서 독립문 방면으로 공격해오고 있는데 아군 병력을 무악재에 배치하겠나 독립문 길거리에 배치하겠나 물어봐도 틀린 대답을 하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축석령이란 요충을 버려두고 금오동에서 시간을 허비한 이형근 사단장은  이미 북한군 전차부대가 축석령을 점거한 다음날(26일) 새벽 3시 정찰도 전혀 하지 않고 5연대 2대대를 축석령에 올려보내 대대가 분산되자  5연대 1대대, 16연대를 연이어 축차투입시켰다. 나중에 축차투입이 금기라고 주장했던 사람이 실제로는 가장 먼저 축차투입에 의한 공격을 실행했던 것이었다.


전쟁 첫날 오후 국군의 최대 위기는 축석령에 있었다. 지금은 6차선도로로 직선화 되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렵고 동쪽의 본자일(本自逸 의정부시 자일동)로 들어가야 원래의 지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만 원래 축석령은 150고지로 도로 양쪽에 5-6미터의 절벽으로 되어있고 매우 좁고 굴곡이 심하여 전차를 방어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다. 또 전차의 진출은 어쩔 수 없이 허용하더라도 뒤 따라 오는 보병과 포병의 진출을 지연시킬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형이었다.


축석령에서 의정부까지는 내리막길에 불과하며 이 구간에는 방어할만한 적당한 지형이 없다. 따라서 축석령의 피탈은 의정부의 실함 뿐 아니라 7사단의 후방이 차단됨을 뜻하며 의정부의 실함은 적군에게 서울로 접근하는 경로가 셋(의정부-송추-연신내, 의정부-창동-미아리, 의정부-퇴계원-중랑교)으로 늘어남으로써 국군의 입장에서 볼 때 서울의 방어가 더욱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후방의 3개 사단이 한강변에 집결하여 결전방어를 실시할 방침을 채택한다 하더라도 축석령은 절대적으로 확보한 후 오래 지탱해야할 중요 지형이다. 축석령을 잃는다면 한강결전이 성립될 수 없다. 후방 3개 사단이 한강변에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은 26일이나 27일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주었어야 했던 축석령을 그냥 내준 것은 초기의 방어작전을 도저히 수습할 수 없게 만든 대실패의 요인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1년 이상 재임했으면서도 축석령에 아무런 대전차 장애물을 구축하지 않았던 전임 7사단장 이준식 준장, 송우리 전투 중 종적을 감추고 상부에 상황을 보고하지 않은 3연대장 이상근 중령, 최후저항선인 방어의 요충 축석령을 내버려 두고 금오동에서 호를 파며 시간을 허비한 2사단장 이형근 준장에 대해 그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


참고자료 한국전쟁사 개정판 1권

            6.25 전쟁사 2권

            한국전비사 중권 p417-418

        사진은 자일동 방향에서 본 축석령. 지금은 너무 변해 이곳이 어디쯤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덧글

  • Real 2011/06/16 19:23 # 답글

    금오동에서 진지를 구축했다는건 결국 이형근 준장의 대전차화기에 대한 맹신 가능성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그의 10대 한국전쟁 미스테리 문제를 보면 미국의 고문관들이 당시 이야기했던 2.36인치 바주카등으로 격파가 가능하다는 것에서 보병의 대전차화기로 기계화전력을 일거 섬멸하려는 어찌보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방식을 택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군 포병과 대위라서.. 걔들 포병들이 어떤 방식으로 싸웠는지 본다면야.. 한국군이 보유한 대전차포등을 고려할때 그런 평지에 선택을 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10대 미스테리에 대한 기록을 봐도 그의 저 금오동 진지구축에 대한 변명일지는 몰라도 대전차화기에 대한 맹신적 모습을 볼수 있으니까요.
  • Real 2011/06/16 19:25 #

    딱 봐도 어찌보면 임진왜란때 충추전투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의 방어선 확보문제의 사항과 동일한 형태의 우를 범했다는 느낌입니다. 더욱이 그것도 적인 북괴가 T34/85를 확보했다는걸 알았었던 이형근 준장이나 일본군이 조총확보와 이를 운용한다는걸 안다는 신립 장군이나 마찬가지니까요.
  • 금성천 2011/06/17 14:18 #

    지금 우리가 토우나 판저파우스트로 북한군 전차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듯이 당시 지휘관 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2.36인치 로켓포로 소련제 전차를 잡을 수 있다고 여겼죠. 미군들이 그렇게 교육을 시켰으니까.

    다만 제가 본 기록중에서는 전쟁 발발 전 한국군에서 딱 한명이 2.36인치 로켓포로는 북한군의 소련제 전차를 파괴하기 어렵다고 예측했습니다. 일본군 전차학교 출신인 조남철 중령만이.

    의정부전투에서의 이형근 장군은 지나친 자신감이었는지 아니면 무책임, 불성실이었는지 그 속내를 알기가 참 어려워요. 그의 주장에는 항상 사실을 호도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보이기 때문이죠.

    금오동에서 축석령까지 차로 5-10분, 걸어가도 1시간 정도의 거리인데 그곳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밤을 보냈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 용뿔 2011/06/17 15:16 # 답글

    대전차화기에 대한 맹신이어서 방어하기 쉬운 지형을 포기했다는 말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대전차화기가 유효하면서도 기타 보포에 대한 방어가 훨씬 유리한 지형을 미리 차지하고 진지구축 및 병력배비가 잘되있으면 더 좋은일이 아니겠습니까? 국군이 보유한 바주카나 57mm대전차포가 당시 북한군전차에게 효과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장수의 기본을 못지킨 것에 대하여 당시 2사단장의 지휘는 비난받아야합니다. 솔직히 멍때린거죠...아 X됐다..ㅆㅂ...이걸 어떻게하냐... 뭐 이러고 대충 현재위치에서 기다려보자 식의 자포자기 식이 아니었나 합니다. 위의 글을 봐도 맨 마지막 문단에 모든 요지가 요약되어있네요
  • 금성천 2011/06/17 16:06 #

    방어계획 육본작전명령 38호에 의하면 2사단은 의정부나 춘천지구에 투입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자기가 2사단장에 임명되었다면 유사시 투입될 의정부나 춘천의 지형에 관심 갖고 대비해야 했을 겁니다. 6월 10일 2사단장 부임명령을 받은 이형근이 대전에 도착한 때가 6월 23일 밤이었으니 무슨 대비가 되어있었겠습니까.


  • 비도승우 2011/06/19 19:12 # 삭제 답글

    측석령고개에서 대전차지뢰를 병목구간에 매장하고 양사이드에서 2.36인치로

    선두전차와 후미전차를 무한궤도공격으로 격파하여 각좌사켜서 기동불능상태로 만들고

    중간에 몰린전차들을 화염병과 수류탄 육탄공격으로 잡는방법도 있고(영천전투에서 실례가있죠 5대격파)

    2진으로 축셕령고개밑에 57미리 대전차포반을 지그재그로 배치하여 만약 고개를 넘어오는전차를 역시 궤도공격

    혹은 일부는 축석령고개 바로 밑 양사이드에 매복시켜 전차후면을 타격하는 방안도 충분히 세울수있었다고 봅니다.


    비록 1950년 당시 전차공포증에 공황상태를 맞이하는 국군의 상황으로서는 빠른상황판단과 임기응변은 힘들었겠으나

    충분히 가능한 대전차전 전술이었다고 생각되며 보전 분리 되어 밀고내려오던 초반북한군 전술을볼때 충분히

    축셕령에서 대량격파가 가능했다고 봅니다.물론 뒤에몰려올 적보병세력 엄호및 방해를 위해 고개정상 양옆구리에는

    BAR와 cal.30 기관총팀이 가용가능한 대량의 수류탄과 준비되야겠죠. 요는 축석령의 선점인데..무슨생각으로 이형근이

    저따위 판단을 내렸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초전의 서울실함실책중 큰책임이 이형근에게 있다고 확신이 드는

    글입니다.

  • 금성천 2011/06/20 11:46 #

    우리가 지금 지도나 구글 같은 위성사진을 봐도 38선에서 만세교, 신북교, 송우리, 축석령, 의정부를 훑어 내려오다 보면 저 축석령처럼 확실한 방어상의 유리한 지형이 없습니다.

    비좁고 긴 축석령에서 대대병력을 동원해서 5x5x1 정도의 구덩이 몇개만 파 놓고 비도승우님 말씀처럼 적극적으로 방어했다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면서 이형근 장군 스스로 그처럼 무원칙한 축차투입을 하는 우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반드시 축석령에 국군의 방어선이 잘 갖추어져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조심조심 올라온 북한군으로서는 참 어이가 없고 국군이 한심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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