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첫날 오전 이형근 장군의 태만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육군본부는 오전 6시에 비상령을 내리면서 출동태세를 갖출 것을 지시했고, 8시에 제2, 제5사단 병력과 제3사단 제22연대 병력을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대전의 제2사단은 서울 이동명령이 내려진지 6시간 후인 오후 2시 30분에 이르러서야 대전에 주둔하던 제5연대 제2대대와 사단본부 병력을 열차편에 탑승시켜 서울로 향했다. 이들이 후방지역 부대들 중 첫 번째로 전선을 향해 출발한 부대였다.


이와 관련해 당시 제2사단장이던 이형근 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오전 10시경’에 긴급사태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비상소집을 건 후 가용할 수 있는 병력과 더불어 서울로 향했다고 증언한다.


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육군본부가 오전 8시에 구두로 하달했다는 ‘작전명령 제84호’는 실재하지 않은 것이 되며 개전 당일 육군본부의 대응에 대한 책임 회피를 위하여 누군가가 사후에 조작했을 가능성을 남겨두게 된다.


또한 반대로 그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면, 개전 초기 육군본부의 명령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 사단장으로서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며, 또 개전 초기의 상황에 대한 그의 증언이 신뢰성을 갖기가 어렵게 된다.


이렇듯 그가 말한 ‘오전 10시’는 단순한 시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쟁 초기 한국군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이형근 준장의 장인으로 당시 광주의 제5사단장이던 이응준 소장은“25일 아침 8시경에 지급 전보 한통이 광주의 내 숙사(宿舍)로 날아들었는데, 공산군이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고, 제5사단은 12시까지 용산에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또한 당시의 제2사단 선임고문관인 갤러거 중령도 “오전 8시에 한국군으로부터 북한군의 월경 사실을 들었으며, 그로부터 1시간 후인 오전 9시경에 고문단사령부에서 보낸 메시지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증언하였다. 갤러거의 증언에 의하면 제2사단 참모들과 군사고문관들은 이날 오전 8~9시경에 북한군의 38선 월경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KBS는 25일 오전 7시에 북한군의 남침을 보도했다)


이를 통해 볼 때 육군본부가 오전 8시에 하달했다는 ‘작전명령 제84호’는 실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제2사단장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또는 자의적으로 묵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어찌되었든 이는 지휘관으로서의 치명적인 실수임이 분명하다.

(6월 24일에 김진섭, 박성환, 이혜복 등 7-8명의 종군기자들과 함께 당시 대전에 있는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의 초청을 받았어요. 다른 게 아니고 25일에 2사단 장병들의 모내기 돕기 작전을 취재하기 위해서지요. 25일 상오 10시쯤 장병들이 대전 교외 들에서 막 모내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본부에서 급히 귀대하라는 전령이 와서 논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대전 시내로 들어왔지요.) 연합신문 이지웅 기자 증언 참조



이형근 장군과 선임고문관 갤러거 중령과의 관계는 매우 불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갤러거는 “제2사단장이 전술 장교가 아니었으며 전술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임명된 자(political appointee)였다”고 혹평하였다. 나아가 그는 “첫 번째 경계명령(오전 6시의 ‘장병긴급소집명령’인 육본작전명령 제83호)이 발효된 지 8시간이나 지난 후인 오후 2시30분에야 첫 번째 기차를 출발시켰는데 이를 두고 참 잘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하면서 이형근 장군의 지휘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렇듯 제2사단은 사단장과 선임고문관 사이의 불편한 관계가 전선으로 이동한 후에도 지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박동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군사 제79호> 2011.6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한국전쟁 인식과 대응 p138-140


25일 오전 6시에 전군 비상대기령이, 8시에 후방사단의 출동명령이 내려왔는데도  2사단은 10시까지 모내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임진강, 동두천, 포천에서 국군이 아우성치며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전쟁이 임박했음을 채병덕 총장에게 누차 경고(?)했다고 이형근 장군 자신은 주장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이 정도라면 민간에서는 사보타지라 하겠지만 이 부대의 지휘관은 군사재판의  극형감이라 아닌가.

이런 경우 2사단은 사단장 뿐만 아니라 참모들이나 예하 지휘관들까지도 사단의 과오를 은폐하는 공범이 되지 않았을까?

왜 이리 대전 2사단의 도착이 느린가하고 속태웠을  육본의 채병덕 총장은 죽기 전까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과 분노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덧글

  • 행인1 2011/06/24 13:02 # 답글

    미군 고문관보다도 2시간이나 늦게 들었다니 정말인지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
  • 금성천 2011/06/24 14:31 #

    정말일 수가 없죠. 그래서 초기 전투에 관한 그의 회고록이나 증언이 신뢰성을 갖기 어렵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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