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에서 서울까지 전차 앞세우고도 3일 한국전쟁

 

“전쟁은 혼란과 오판의 연속이다”란 말이 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공감 가는 명언이다. 전쟁 전 북한군에게는 공격계획이 있었고 국군에게는 방어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초기전투를 보면  북한군이나 국군이나 전혀 그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북한군은 국군주력을 포위섬멸하여 조기에 전쟁을 종결하는데 실패 했고 국군은 38선을 방어 회복하는데 실패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의 초기작전에서 또 하나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도대체 국군이 얼마나 무능했기에 북한군이 38선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3일 밖에 걸리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북한군과 국군의 전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해본 사람이라면 북한군이 중공으로부터 공급받은 인적 자원과 소련으로부터 받은  압도적인 전차와 대포를 가지고 불과 50Km의 거리를 기습 진격하는데 3일씩이나 걸린 것에 대해 의아스러울  것이다. 


T34를 파괴할 수준의 대전차화기가 하나도 없고 대전차지뢰도 거의 없는 국군이 유리한 지형마다 방어선을 펴며 105전차여단을 앞세운 북한군의 서울 진입을 3일이나 막아낸 것은 오히려 칭찬해 주어야 할 일이다. 그 정도의 전력 차이라면 전쟁 첫날이나 늦어도 2일째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어야 정상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한양에 도달하는데 20일이 걸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고속도로로 400Km가 약간 넘는 거리이나 조선시대의 도로는 직선이 아닌 산 넘고 고개 넘어 물을 건너서 하는 식이니 500Km가 넘을 것이다. 500Km의 거리를 20일 걸려 왔으니 하루 평균 25Km를 걸어서 전진해 온 것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38선에서 서울까지 약 50Km의 거리를 기습 공격하여 전차를 앞세워 내려오는데 3일이나 걸렸다. 하루 평균 16~17Km 밖에 전진을 못한 것이니 임진란의 왜군보다도 느린 것이다.


원래 북한군은 전쟁 2일째에 서울을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의하면 전쟁 직전 북한군 지도부가 105전차여단에 부여한 임무는 다음과 같다.


“105탱크여단은 주공방면인 철원-서울 축선에서는 4,3사단과 협조하여 적의 방어선을 돌파, 포천(신읍리)지역까지 진출 후 107, 109탱크연대 및 차량화저격연대가 보병의 전과를 확대하면서 당일 오후 늦게 의정부지역까지 진출한다. 전투 2일째 되는 날 4,3사단과 협조하여 서울을 점령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은 105전차여단을 서울 점령의 주력부대로 운용함으로써 서울 점령을 2일째에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이 실제 작전에서 서울에 진출한 것은 28일이었기에 3일을 소모함으로써 그들의 계획에 비해 하루 늦어진 것이다.


만일 북한군이 2일만인 6월 26일 중으로 서울을 점령했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야기될 수 있었다.


첫째, 26일 당시에는 후방 예비사단들이 서울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방어진지에 배치되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군과 맞닥침으로써 전투력 발휘는 더욱 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대한민국 전쟁지도부는 26일까지도 전쟁의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다 조직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셋째, 미국정부가 참전문제를 토의하는 시점에서 한국군이 싸우지도 않고 수도 서울을 포기하거나 서울에 있는 군사고문단요원 및 미국 민간인들이 인질로 잡히거나 포위된 상황이 조성되었다면 미국정부가 과감한 참전정책을 채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미국 민간인들의 서울 탈출은 27일 01시에 완료되었다.


결과적으로 만약 북한군이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면 전쟁은 당시 상황과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을 것이고 전쟁의 승패가 여기서 결정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이 그들 계획대로 전쟁 2일째에 서울을 점령할 가능성이 있었던가를 분석해보는 것은 전쟁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38선에서 서울까지는 불과 40-50Km 정도의 야지기동으로 도달할 수 있으며 북한군의 진출이 빠를수록 국군의 창동방어선과 미아리방어선은 형태를 갖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볼 때 북한군이 공격당일에 의정부를 점령하고 2일째에 서울을 점령한다는 계획은 충분히 달성 가능한 계획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군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그들의 목적을 뒷받침할 수도 있는 계획이었다.


6월 25일 04시 38선에서 남침 개시


6월 26일 13시 의정부 점령           38선 -의정부 거리 25Km   소요시간 33시간


6월 27일 10시 창동방어선 돌파       의정부-창동 거리12Km     소요시간 21시간


6월 28일 01시 미아리방어선 돌파     창동-미아리 거리 4Km     소요시간 13시간


북한군이 의정부를 함락시킨 것은 26일 13시였다. 의정부를 점령한 북한군이 창동방어선을 돌파(27일 10시)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21시간이었다. 의정부에서 창동까지는 불과 12Km 정도로서 당시 국군의 방어실태와 북한군의 능력을 고려할 때 4-6시간이면 충분히 진출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었고 전쟁의 기로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2일차 야간에 휴식을 취했거나 정지한 채 대기했다. 초기작전의 긴박한 상황에서 이들이 굳이 휴식하거나 대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군이 의정부를 돌파하고 난 후 마음만 먹으면 당일로 서울에 진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26일 13시 의정부를 점령한 북한군이 미아리방어선을 통과한 것은 28일 00시 30분이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극히 미약했던 일부지역의 방어선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던 미아리방어선까지의 16Km구간을 진출하는데 무려 34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북한군의 기동이 어느 정도만이라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면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점령한 북한군이 26일 늦은 밤까지는 충분히 서울에 도달할 수도 있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당시 국군의 대전차화기(2.36인치 로켓포, 57밀리 대전차포)로는 전혀 막을 수 없는 T34라는 괴물과도 같은 고속 기동장비를 가지고 또한 소련군의 전차 전술와 종심공세전법을 배웠으면서도 38선에서 서울까지 3일이나 걸렸다는 것은 고속철도 KTX를 가지고 서울 천안간의 완행전철로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은 달성 가능했던 26일까지의 서울 점령을 그들 스스로 분석처럼 국군이 유리한 지형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전투력운용상의 미숙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으며 잡았던 승리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국군의 용전과 북한군의 실수로 인해 절대절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주참고자료  
<6.25전쟁의 이해> 최용호 저


보조 자료
<라주바예프의 6.25전쟁 보고서>

<6.25전쟁사 2권>



덧글

  • 비도승우 2011/07/14 17:54 # 삭제 답글

    임진왜란과의 비교 참으로 재밌습니다^^. 1592년 4월13일 왜군의 부산상륙부터

    5월2일 한양함락까지 20일간 진격속도 왜군일일평균진격속도 25km 라는 데이터는 당시 한양에서 부산까지

    도보로 15-17일 발빠른 보부상이 7-8일 말로 역참을 이어달리기하듯 달리면 3-4일 이라는 당시기준으로 보면

    그야말로 왜군은 "유람하듯" 초전을 치루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고보면 인민군의 보전협동전술미숙과

    기타실수들이 서울점령에 "3일씩이나" 걸린셈인데요. 보전혐동미숙의 첫째 과오가 구소련군의 기동전술..즉

    전장까지 보병을 전차상부에 탑승시킨채로 이동하는 전술을 사용하지않은부분과 하나주목할만한것은 당시에도

    도로사정이 열악하여 인민군 부대 끼리의 교통혼잡이 벌어져 이를 정리하느라 시간들이 지체되었던 부분,

    그리고 저의 한가지 추론- 북한역시 부유롭지 못한 신생국가의 입장에서 전차를 소련에서 광물자원과 기타 자원을

    매각하거나 임대해주는 수법으로 사온 고가의 전차를 애지중지하여 초전에 육탄공격이나 105mm직접사격같은 방식으로

    손실을 입을때 일단 퇴각하여 시간을 지체했던점이 "3일씩이나" 서울점령에 시간을 소비하게된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북한은 소련에서 "공짜로 전차를 공여받지않았습니다". 50년9월이후 인민군 기갑세력이 전멸한다음 150여대이상의

    추가물량을 소련에게 무상지원받지만 그전의 물량 242대의 T-34/85 형과 SU-76 자주포 100여대 도합 350여대의

    초반기갑전력은 "돈을 주고 사왔기에" 한두대라도 격파되면 일단 전장에서 물러났던것도 하나의 시간지체이유라고 봅니다.

    일일이 국군전력을 상대하지 않고 과감하게 돌파하며 손실은 내버려두고 후속부대가 국군부대를 상대하며

    초반러쉬하듯 서울점령부터 임무를띤 하나의 기계화유닛을 편성 그 특임부대는 서울로 몰려가고 후속 보병사단이

    밀고 내려오며 어차피 공황상태에 빠진 국군부대를 정리하며 내려왔다면 서울은 개전이틀차에는 분명 함락되었을것이며

    미군사고문단과 민간인 포로까지 대량획득되었다면 미국으로서도 딜레마에 봉착했을것입니다만..

    그런전술을 구사하기에는 당시 북한수뇌부역시 짧은군사지식과 경험으로는 상당한 모험이라 생각되어 기각되었거나

    발상자체를 못했을것입니다. 북한의 판단미스와 경험부족이 지금 인터넷으로 글을 남길수있는 여건을 만들어준

    하나의 큰 요인이라는것은 부인할수가 없겠네요.(국군선배들과 호국영령들의 업적이 물론 우선합니다만)


  • 캥거루 2011/07/15 11:05 # 삭제

    전차가 일부 손상된 정도로 정지하거나 후퇴한 예들은.... 단위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하급 지휘관들의 경험 부족이 이유일 겁니다. 그나마 국공내전이나 38선에서 어느정도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이 많았던 보병과는 달리 전차 부대는 전장에 투입된 것이 처음이었으니까요.
  • 행인1 2011/07/14 22:21 # 답글

    소련고문단이 종심작전이며 기갑전술이며 사단단위 작전이며 등등해서 가르치긴 했지만 2~3년 사이에 다 배우지는 못했겠죠.
  • 초딩 2011/07/15 09:54 # 삭제 답글

    원래 전차전의 원조는 독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그러다가 2차대전중 북아프리카에서 패튼군단이 전통을 이어받았고,이 개념하에서 6.25 한국전장에선 전차전이
    맞지 않다고 미군측에서 판단한 거 같고...
    소련의 종심작전이라 하시니 '해바라기'란 영화가 생각나는군요.
  • 초딩 2011/07/15 10:26 # 삭제 답글

    6.25당시 북괴군의 전차술은 햇병아리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말로 '보전 협동'이라면 후속보병이 있어야 되는데 적전차의 단독행동이 많이 보이고
    (그러다가 예상외의 대전차공격을 받으면 일차후퇴 하기도 하였고)
    또한 6/28 창경원.동대문 등에서 한두씩 단독행동을 했다고 하니 무모/용감하단 느낌이 듭니다.
    아군 소총총격에 대해 적 전차의 장갑보호 효과가 대단하지만 보병의 엄호가 없다는 건 무모할 뿐입니다.

    6.25 기록사진을 보면 미군 전차위에서 중공군이 소총으로 제압하는 장면도 보이던데
    우리도 6.25초전 만세교~축석~미아리에서 이런 전투만 있었으면...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9연대나 3연대가 접적후퇴하에 43도로로 창동까지 지연전이 이루어졌으면...

    화력이 열세이면 야간공격과 기습전도 효과적이고,적보병과 전차를 분리시키는 노력도 필요한데
    3연대나 9연대는 접적후퇴는 생각도 않고 한방에 인접지역인 덕정이나 내촌/태릉으로 내뺐으니...
    그런데 우리는 약 2년간 후방소탕작전도 거쳤고 연대장 정도라면 연대/대대 전투지휘는 가능할텐데

    1사단이나 6사단의 성과와 비교한다면 전투여건은 마찬가지고 단한가지 '자기희생과 정신력'
    그런데 이에대한 처벌(?)이 없었던거 같습니다.

  • 캥거루 2011/07/15 12:17 # 삭제

    압도적인 화력과 기동력을 갖추고 전차 지원까지 받는 적의 맹공을 받아가면서 이미 전열이 붕괴하고 통신도 끊겨 뿔뿔히 흩어진 부대들을 몇시간만에 수습한 후... 예비 진지나 원군도 없이 그런 재주까지 부릴 수 있었다면 아마도 찬란한 명성을 전사에 새기게 되었겠지요...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도 빈약한 군대를 이끄는 경험 없는 지휘관에게 가능한 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만....
  • 금성천 2011/07/15 16:26 #

    1,6사단과 7사단의 여건은 상당히 다릅니다.

    1사단은 임진강, 파평산 감제고지,전체적으로 많은 수전지대 등의 지형상 유리한 점이 있었고 6사단의 경우도 춘천은 소양강 남쪽의 봉의산이란 감제고지와 소양강 북쪽의 허허벌판인 우두평야가 있고 인제 홍천간 도로는 우마차 다니기도 힘든 좁은 산길로 되어있습니다.

    1,6사단 지역은 방어상 유리한 지형이지만 7사단 특히 포천 방면 9연대 쪽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별로 없습니다. 만세교도 신북교도 그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못되고 무봉리에서 축석령에 이르는 길이 그나마 좋은 지형인데 이 곳을 3연대장의 도주와 2사단장의 태만으로 그냥 내준 겁니다.

    또 상대했던 북한군의 전차 대수도 1사단은 27(+4)대의 전차를, 6사단은 0(6사단과 8사단 방면으로는 아예 전차를 투입하지 않았음)대의 전차를 상대했지만 7사단의 동두천 1연대는 13대의 전차를, 포천의 9연대는 80대(그중40대는 포천 베어스 타운 북쪽 서파 쪽으로 오다 도로 사정으로 되돌아감)의 전차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1사단과 6사단은 잘 했는데 7사단은 쉽게 무너졌다고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2011/07/15 16:58 # 삭제 답글

    제가 알아본 자료에는 '49 5/ T-34 150대.'50 4/ 100대 추가 합계 242대로
    옹진/문산에 40대.동두천/포천 150대.춘천 40대.주문진에 10대를 배치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춘천의 옥산포전투와 말고개에도 전차가 언급되던데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틀리다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되겠네요.
  • 금성천 2011/07/15 17:54 #

    십여년 전에는 저도 딩님과 비슷하게 알고 있었어요. 춘천이나 홍천으로도 전차가 내려온 것으로.

    그런데 라주바예프 보고서가 공개되고나서 6,8사단 지역으로는 전차가 투입되지 않았다는 이 보고서의 기록이 설득력 있는 것으로 여겨져 근래의 공간사는 라주바예프 기록에 따르고 있으며 옥산포나 말고개의 전차는 T34가 아닌 SU76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초딩 2011/07/15 19:20 # 삭제 답글

    오잉? 자료가 바뀌었넹.
    라주바예프 기록은 먼데요?
    하긴 심일중위의 7연대 대전차포중대 육탄전은 SU자주포라고 명시되어 있으니까
    신뢰도가 높으네요.

    근데 적전차가 더 많았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체면이 덜 상할텐데 아쉽다.
    하나 자주포도 몸체는 동일형이고 전차인지 자주폰지 구분도 못하는 실정이라 했으니
    아군이 갖는 공포는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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