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덕 장군 전사지 하동 쇠고개 전투 현장 한국전쟁

하동버스터미널에 내리자 눈이 마주친 50대 중반쯤의 택시기사가 탈 것을 권한다. 어차피 하동 지리도 모르고 시간도 절약해야 하기에  채병덕장군전사비가 있었던 곳을 아시느냐 물었더니 자신 있게 안다고 한다.

그런데 택시에 타자마자 묘한 말을 한다. “그런데 거기 지금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니. 기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니요?” 순간 떠오른 불안감은 6.25때의 전적지들이 지리적 요충에 있다 보니 지금도 군부대가 주둔하여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 경우를 간혹 보아왔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게 사실은 그 길을 사용하지 않아 지금은 폐도가 되어있을 겁니다.”

기사의 부연설명은 채장군 전사비가 서있던 고개(우치, 쇠고개)길은 과거 부산과 목포를 이어주는 2번국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삼십여 년 전 새로운 2번국도가 아래쪽에 생기면서 그 길은 자연스레 사용하지 않는 길이 됐다는 것이다.


애초에 하동의 쇠고개를 답사지로 삼은 것은 채병덕장군과 수백 명의 미군이 몰살당한 전사의 기록과 현지의 지형을 직접 한번 살펴보자는 것과 함께 우리나라 남쪽 끝부분 시골이니 고개길이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껏해야 확장 정도 되었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소 느긋한 예상이었는데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기사의 말이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동읍에서 동쪽으로 고갯길을 몇분간 달리니 우측에 새로 세운 채장군 전사비와 장갑차등이 보이고 조금 더 달리다 좌회전하니 우측으로 작은 마을(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계성마을)을 끼고 급한 고개길이 나타난다. 고개길 정상쯤에 다다르니 북쪽은 약간의 평지로 적량농공단지라는 간판과 함께 큰 건물 몇 채가 있고  동쪽은 숲이다.

숲 앞에 이르자 여기가 옛날 2번 국도라 하는데 나로서는 참 기가 막힐 노릇인 게 책으로 읽었을 때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정말 길이 아니고 숲이었던 것이다. 내가 난감해 하자 기사는 그럼 이 길의 반대쪽 입구 즉 동쪽입구 쪽으로 가보자 한다. 서쪽입구가 이 모양이라면 동쪽입구도 다를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랴. 조금 나을 수도 있겠지.

다시 택시를 타고 이번에는 마을을 왼쪽에 끼고 U자 모양으로 돌아서 동쪽입구에 도달했다. 그곳은 다소 편평한 지형이었지만 아주 좁은 길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기사는 인사치레로 차로 조금 들어가 보자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10년 묵은 지프가 아닌 한, 차로 들어가자고 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기사에게 사례한 후 그길로 들어섰다.


전날 내린 폭우로 길바닥은 질퍽했고 허리 가슴까지 올라온 잡풀과 나무들이 나의 전진을 방해했다. 벌레 나비 나방들이 날아다니고 거미줄은 꼭 입을 파고든다. 누군가가 이 길로의 진입을 막기 위해 꺾어 놓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나무들이 더욱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우산을 총대삼아 헤치고 나아가지만 수많은 죽음이 있었던 곳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걷기 싫은 길이다.

이 길이 그래도 2번 국도였다면 버스도 다니고 트럭도 다녔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길도 사람이 다니면서 만들어지고 인적이 끊어지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구나 하는 상념과 함께 계속 들어가자 오른쪽으로 계단과 함께 시멘트 기단이 보인다. 올라가 보니 무덤이 있고 이름 모를 꿩만 한 크기의 갈색 새 20여 마리가 모여 있다가 침입자에 놀라 후두두둑 날아오른다. 무덤 뒤 위쪽으로 올라가 보면 혹시 주변을 조망할 만한 곳이 있지 않을까 하여 계속 올라가 봤으나 나무가 너무 우거져 정상에 오른들 볼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하고 다시 옛날 2번 국도로 내려왔다. 조금 더 걸으니 아까 맨 처음 왔던 서쪽 입구다.

무더운 날씨에 불안감 긴장감 게다가 갑작스런 등산(?)이 더해져서인지 숨이 차고 현기증이 나서 길바닥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채장군 전사비는 그 무덤 근처에 있었을 것 같고 채장군이 저격당한 곳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보았다.


전사기록과 지형을 꿰어 맞추며 한참 궁리중인데 노인 한분이 지나가신다. 다가가서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채병덕장군의 전사비가 있던 위치를 아십니까?” 하니 노인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진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왜 좋은 일도 아니고 그런 일로 여기까지 와서 찾느냐고 힐문하듯 하는데 순간 나는 하동분들에게 채병덕장군 이야기는 금기사항이 아닐까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래서 서울에서 이 하동까지 오게 된 사유를 설명 드리니 자신은 줄곧 이곳에서 살았고 6.25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기에 당시의 하동전투를 기억한다고 했다. 미군이 몰살당한 곳은 바로 지금 우리가 서있는 여기인데 과거엔 이 적량농공단지가 180고지로 이어진 능선이었다고 한다. 즉 산의 일부를 깎아냈기 때문에 지금은 넓은 평지처럼 되어있다는 이야기다.

이곳에 미군들이 머물고 있는데 북서쪽의 180고지와 남쪽의 무명고지에서 북한군의 사격이 쏟아졌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보니 전사기록과도 부합되고 정말 걸려들면 헤어날 방법이 없는 장소이다. 기관총 2정만 있어도 수백 명을 도륙할만한 매복지형이다.

 

채장군의 전사비가 있던 정확한 위치를 물어보자 그 숲길(구2번국도)로 들어가보자 한다. 노인이 앞장 서고 내가 뒤따라 가는데 한 50여미터쯤 들어갔을까? 노인이 “허허, 그래서 내가 여기 고무신 바람으로 들어오는게 내키지 않았는데......”한다. 뱀이 지나갔다는 것이다. 또 이 곳은 뱀이 많다는 것이다. 아! 아까 나는 모르니까 용감하게 지나왔지 알았으면 더 불안하고 괴로웠을 것 아닌가. 노인도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 정확한 위치가 애매한 모양이나  내가 추정한대로 그 무덤자리가 채장군 전사비가 있던 곳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 길이 2번국도이던 시절 길가 가장자리에 전사기념비를 세워 누구나 지나가며 볼 수 있게 하였으나 폐도가 됨에 따라 비석을 국립묘지로 옮긴 것이다. “그날의 산하”라는 책에는 저격당한 채장군이 마을 주민들에 의해 업혀 내려오다 숨을 거둔 장소가 바로 이 비석이 있던 자리라고 하나 그리 신빙성 있는 이야기 같지는 않다. 다시 그 적량농공단지 입구로 빠져나와 노인에게 감사드린 후 다시 한 번 이곳에 오기 전에 가졌던 의문점들에 관하여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미군 29연대의 1개 대대 병력 중 400명 이상이 한 곳에서 몰살당할 수 있었을까?

 

미군의 실수를 꼽는다면 대대주력이 이 계성마을에 도달하기 전에 전초대로 하여금 180고지와 남쪽고지를 제대로 정찰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여서 허무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미리 매복하고 있는 북한군의 공격에 이 지형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장소이다. 들어오지 않았어야 할 곳이고 일단 들어왔다면 빠져나가기 힘든 곳이다. 더군다나 동쪽 후퇴로는 하천에 막혀 더 희생이 컸다.


채병덕 장군이 미군복장을 한 채 접근하고 있는 북한군들에게 수하를 했다가 제 일탄에 전사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수행한 한국군 장교들이 여럿 있는데 왜 성질 급하게 먼저 나섰다가 변을 당했을까? 180고지에 어른거리는 자들을 미군이 무반동총으로 공격할 때 채장군을 수행하던 박현수 중령은 그들이 하동에서 작전하던 이영규부대원일지 몰라 조마조마했다는 기록을 보면 채장군도 미군복장을 한 무리들을 한국군일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50년 7월 27일 하동 전투가 있었고 진주 마산까지 밀렸던 미군이 9월에  이 지역을 회복하였을 때 수습한 시신은 341구였다.

         

         채병덕 장군 전사비



사진 설명

1번째 사진   채병덕 장군과 미군 지휘부가 저격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곳
2번째 사진   옛 2번국도의 계성마을 동쪽 입구
3번째 사진   채병덕 장군 전사비가 있던 곳으로 추정 되는 기단. 2007년에는 무덤이 있었으나 2008년에는 없어진 상태
4번째 사진   쇠고개(우치)에서 계성마을로 올라가는 길 입구(옛 2번국도). 미군복장의 북한군이 올라온 길.
5번째 사진   채병덕 장군 전사 추정지에서 본 북서쪽 180고지 방향. 이곳에서 기관총탄들이 날아왔다.
6번째 사진   계성마을 채장군 전사 추정지에서 본 남쪽 무명고지. 여기서도 기관총탄들이 날아왔다.
7번째 사진   미군 후퇴의 장애가 된 두전천
8번째 사진   옛 2번국도(부산-목포)의 현재 상태. 계성 마을 서쪽 입구
9번째 사진   하동 쇠고개(우치)의 새로 세운 채병덕 장군 전사비
10번째        위성사진으로 본 하동 전투현장. 화살 표시가 채병덕 장군 전사 추정지. 가운데 계성마을 북서쪽으로 180고지 방향, 남쪽으로 무명고지가 보인다. 오른쪽 끝 부분이 두전천. 옛 2번국도는 계성마을과 오른쪽 숲의 경계부근에 있어 잘 보이지 않으나 화살표부터는 명확히 보여 아래로 내려가서 하동 쇠고개와 만난다.

위성사진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으신 분은 네이버에서 "적량농공단지"를 검색하여 확대해 보세요. 마을 북서쪽의 180고지 방향과 남쪽의 무명고지에서 화살표 부근으로 기관총탄들이 날아오는 상상을 하면 참 무섭습니다.

덧글

  • 비도승우 2011/07/28 20:17 # 삭제 답글

    채병덕은 평양출신으로 일본근 시절에도 상관에게 대들었던(폭행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신빙성이 없는듯)

    일화들만 해도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인것이 예측되며 하동에서는 일종의 백의종군 하는신세이니 공명심이 더욱 생겨

    앞장서서 일하다가 변을당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형을 보아하니 "한명이 막으면 천명이 두려워할"지세인데

    미군은 사전정찰을 게을리한 댓가를 톡톡히 본셈이군요..
  • 금성천 2011/07/29 12:45 #

    채병덕의 일본군 장성 폭행설은 사사끼가 채병덕의 일본 육사 동기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폭행 정도가 어느 수준이었을까가 궁금합니다만. 육사 재학시절 일본인 동기생들과 그린 친하게 지내진 않은 듯 합니다. "혼자 열심히 공부했다" "수학을 잘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구판 한국전쟁사에 채병덕이 일본 방문시 일본 육사동기생들을 만나 "한국은 잘 안되게 되어있다.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는 다소 황당한 기록이 있습니다만 사사끼가 탐문한 바 채병덕의 육사 동기생 중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저 지형이 동쪽 입구로부터 그냥 걸어서 들어갈 때는 잘 몰랐는데 정작 그 피습 위치에 서보니까 북서쪽와 남쪽으로부터의 사격에 꼼짝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전에서는 지도를 꼭 미리 살펴 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행인1 2011/07/28 23:24 # 답글

    대대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 셈이로군요. 사연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노인분들이 금기시 하는 것도 일리가 있을듯 합니다.
  • 금성천 2011/07/29 14:00 #

    저 계성마을 주변에 7월 27일부터 9월까지 341구의 시신이 방치되어 있었다니 끔찍했겠지요.
  • 저작권 침해 신고 2012/06/27 18:22 # 삭제 답글

    안녕하십니까? 선생님께서 직접 촬영하신 사진의 저작권을 침해한 사이트를 발견 하여 알려드립니다.
    http://rigvedawiki.net/r1/wiki.php/%EC%B1%84%EB%B3%91%EB%8D%95
    이 주소로 들어가면 엔하위키 채병덕 항목인데 선생님께서 9번 사진으로 올려놓으신 사진을 무단으로 도용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 김병철 2013/01/07 15:55 # 삭제 답글

    채병덕장군이 저쪽에서 돌아가셨다구요. 아닌데..당시 실종이었다는데 저희 아버님이 옛날부터 그러더군요. 시신이 직접치웠다고..대구 모지역에 위병근무설때 채병덕장군과 미국 장군이함께와서 시찰중 폭격이 떨어져 부하들과 그기에 뒤섞여져 한꺼번에 같이 싣었다고 누누히 말씀하시구있음.
  • 김병철 2013/01/07 15:57 # 삭제 답글

    저희아버님 아직 건강하시니 궁금하시면 직접물어보세요. 시신을 직접실어줬다고 누누히 말씀하십니다. kbc6638@hanmail.net 로 문의바람.
  • WKFK 2014/05/29 11:15 # 삭제 답글

    채병덕은 대대몰살로 분노한 미군에게 처형된거임.

    일국의 참모총장을 지낸사람이

    일개미군대대 고문관역할을 하면서 따라다린꼬락서니라니..
  • KOREA 2014/06/02 11:54 # 삭제

    그게 아니고 맥아더에게 암살 당했음.
    채병덕은 맥아더의 지시에 반항하여 해임되었고
    맥아더는 앙갚음으로 채병덕을 암살했음.
    채병덕이 암살될때 맥아더가 대구에 와 있었음.
    암살한 일당을 없애기 위해 폭격했을수도 있음.
  • 김지우 2014/07/20 03:33 # 삭제 답글

    암살한 일당이 죽었다매
    암살한 일은 어떻게 누가 알고 있누~?
  • KOREA 2014/07/26 08:27 # 삭제

    채병덕이 맥아더의 지시에 반항한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알고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의 전화를 받고 채병덕을 해임 했다고 프란체스카 여사가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채병덕을 신뢰했으나 마지못해 해임한 증거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맥아더가 채병덕에게 앙심을 품을 상황이다.
  • 김지우 2016/11/16 03:34 # 삭제 답글

    질문에 촛점을 모르는 듯..

    앙심이라면..
    오히려 채병덕이 맥아더한테 앙심을 품을 상황인데~???

    채병덕이 맥아더한테 반항할 기회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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