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법회의에서 사형을 구형 받았던 이성가 8사단장 한국전쟁

 강동에서 철수작전을 개시한 8사단은 강행군을 계속하여 황해도 금천군 토산면의 토산에 무사히 도착했다. 12월 5일이었다.


이성가 사단장은 모든 장병들이 추위 속에서 장거리 행군하여 몹시 피로에 지쳐있었으므로 군단장의 승인하에 이곳에서 3일간 휴식하기로 했다.


이때 예하 연대장으로는 16연대장으로 유의준 중령이 그대로 있었고 실종된 10연대장 고근홍 대령의 후임으로는 사단 작전참모였던 권태순 중령이 부임하여 지휘하고 있었고 21연대장이었던 김용배 대령이 타 부대로 전출하여 사단 인사참모였던 장호강 중령이 후임연대장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사단이 토산에 도착한 다음 날, 사단장은 상급부대로부터 “사단은 현 위치에서 연천을 거쳐 원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덧붙여 토산에서 연천에 이르는 통로가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우회하는 한이 있어도 고랑포 쪽으로 돌아가도 무방하다고 명시해놓고 있었다.


이에 사단장은 각 연대장들과 참모들을 소집하여 부대 이동로를 확정하기 위한 회의를 가졌다. 사단이 토산에서 연천으로 이동하려면 삭녕, 구대동을 거쳐 연천에 이르는 도로를 사용해야 했으며 이 도로를 사용할 경우엔 임진강 상류에서 여러 차례 강을 건너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교량이었다.


이때 사단장이 알고 있는 교량 실태는 북한군이 퇴각할 때 기존 교량을 모두 파괴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차량을 제외한 도보부대만이 겨우 건널 수 있는 가교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 도로를 택할 경우 도보부대는 우회할 필요가 없어 지근거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 반면에 차량부대는 도보부대와 분리되어 다른 통로로 우회 이동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사단장은 상부에서 지시하고 있는 고량포로의 우회이동을 내세웠으나 연대장들이 이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장병들이 장거리 행군으로 모두가 지쳐있는데 고랑포로 우회할 경우엔 상당한 거리를 더 행군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연대장들의 건의를 기각할 수 없었던 사단장은 나름대로 판단한 후 도보부대와 차량부대를 분리하여 각기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이동시키기로 했다. 즉 사단장은 사단 주력인 도보부대는 연대장들의 건의대로 토산에서 삭녕, 구대동, 연천을 거쳐 원주로 직행하고 차량부대는 환자와 중장비 그리고 각종 보급품을 적재하고 시변리로 되돌아 나간 다음 국도를 이용하여 개성과 서울을 경유, 원주로 직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주력부대인 도보부대는 사단장이, 차량부대는 부사단장인 윤춘근 대령이 각각 맡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정에도 문제가 있었다. 즉 평양 방면에서 철수하는 유엔군 부대들에게 국도 사용의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었으므로 8사단 차량부대의 국도 진입을 미군 당국에서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8사단에 허락된 철수로는 국도를 이용하여 시변리를 거쳐 연천에 이르는 도로였다. 그런데 철수하는 유엔군의 기계화부대와 도보부대, 거기다 피난민들까지 끼어들어 대혼잡을 이루고 있는 국도에 8사단의 차량부대까지 끼어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끝에 사단장이 차량부대와 동행하게 되면 미군 당국에서도 어느 정도 묵인해 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 저러한 문제점을 놓고 세심하게 생각해 본 사단장은 강동에서 토산까지 철수해 오는 동안 적과의 접전 없이 이동해 왔기 때문에 부대가 지근거리에 있는 연천까지 이동하는 동안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마가 큰 화근을 자초하게 되었다.


차량부대와 같이 행동하기로 결심한 사단장은 도보부대의 지휘를 연대장 중 가장 고참이자 선임자인 16연대장 유의준 중령에게 잠시 맡기기로 하고 자신은 부사단장과 함께 차량부대와 행동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음 날 아침 도보부대는 연천을 향해서, 그리고 차량부대는 시변리를 향해서 각기 토산을 떠났다. 사단장이 동행한 차량부대는 시변리를 거쳐 금천까지 이동하여 국도로 진입하려고 했으나 예상대로 미 8군 당국의 제지가 강력했다. 이성가 사단장이 직접 나서서 미 8군 당국에서 나와 있는 미군 대령과 협의 끝에 8사단의 차량부대가 어렵게 국도로 진입한 후 개성을 거쳐 서울에 당도했다. 여기서 잠시 휴식 후 차량부대는 원주를 향해서 출발했고 사단장은 주력 도보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연천을 향해 북상했다.


사단장의 차가 의정부 시가지를 벗어나 동두천을 향해 질주하고 있을 때 이성가 사단장은 사단 주력 부대가 적 게릴라의 기습을 받고 상당한 피해를 냈다는 급보를 받았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마치 대전투를 치른 후의 전쟁터처럼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후송되지 못한 부상병들의 신음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어떻게 이런 일을 당했습니까?” 그러자 유의준 연대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도보부대가 임진강변에 도착해서 도하할 교량을 점검하고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중대별로 도하를 시작했습니다. 그 외의 병력들은 강변에 집결하여 도하 순서를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개 중대가 도하를 끝내고 다음 중대가 도하를 막 시작할 때 저 앞산에 매복하고 있던 적 게릴라가 기습적인 사격을 가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곳에서 도하를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은 즉각 응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은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기습사격을 가해왔는데 이 좁은 강변에 워낙 많은 병력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먼저 도하한 중대들이 즉각 적을 공격했기 때문에 적의 기습사격은 순간적으로 끝났고 지금 2개 중대는 적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각하! 이 사고는 저의 지휘 잘못에 있었으므로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연대장의 보고를 들은 사단장은 이 사고의 주된 원인이 경계 소홀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2군단장이었던 유재흥 장군은 이 사건에 대해 그의 회고록 격동의 세월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2월 9일 유의준 연대장이 지휘하는 사단이 토산을 출발하여 얼마 가지 않아 임진강변에 이르렀을 때 적 유격대(패잔병)로부터 습격을 받고 막심한 손실을 입었다. 내가 사단에 지시한 기억으로는 사단이 우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랑포 쪽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했는데 연천 통로가 막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행 돌파를 기도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전투경험이 많은 이성가 사단장이 주력부대를 놓고 차량부대를 끌고 떠났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지금도 석연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


이로부터 15일 후인 12월 25일 이성가 장군은 사단장에서 해임과 동시에 경계 소홀의 책임을 물어 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이때 이성가 장군을 기소한 죄목은 두 가지였다. 즉 지휘관의 직무유기와 군무이탈이었다. 이 두 가지 범죄는 적전에서 이루어진 행위일 경우 사형까지 선고하게 되어 있었다.


군법회의는 51년 1월 초순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 법정에서 열렸다. “전선에서 부대 이동중인 지휘관이 주력부대를 지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대 지휘를 연대장에게 일임하고 차량부대와 행동을 취한 이 사실을 지휘관의 직무유기이자 군무이탈로 밖에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직무유기로 인해 적의 기습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내게 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단장에게 책임이 있다. 이에 이의가 있으면 피고는 진술하라”


이성가 장군은 경계소홀로 인한 작전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고 이를 기화로 자신을 직무유기와 군무이탈로 법정에 서게 한 데 대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전쟁 발발 이후의 전투사를 살펴볼 때  경계소홀로 지휘소를 기습 당했던 지휘관도 여러 명 있었고 또한 참담할 정도로 작전실패를 한 지휘관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선 아무런 문책도 없이 넘겨버렸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은 부대를 “신속하게 이동”시키기 위해 잠시 주력인 도보부대의 지휘를 연대장에게 맡기고 차량부대와 함께 행동을 함께 했던 것인데 이것이 왜 군인으로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직무유기이고 군무이탈죄가 되는 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함께 기소된 부하들을 생각하여 차오르는 불만감을 억제했다.


“나는 작전에 실패한 패장인데 할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동간에 발생한 그 돌발사태는 내가 사단장직에 있을 때 발생한 일인 만큼 지휘관이었던 내가 모든 책임을 감수할 것이니 나의 부하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말아 줄 것을 당부할 뿐입니다.”


이어 검찰관은 사형을 구형했으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1차 재판이 끝난 후 이성가 장군은 생전 처음 진한 고독감을 느꼈다. 고성척영(孤城隻影)과 같은. 창군이 되면서 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일군출신, 만군출신, 그리고 광복군 출신 계열이었다. 이들은 파벌을 형성하고 서로 눈에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상부상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남경군관학교 출신은 군내에 이성가 장군 단 한 명 뿐 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그런 선배도 후배도 없었던 것이다.


군사법정에서 이성가 장군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일부 고위층에서는 반발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성가 장군이 사단장으로 보직되었을 때 그를 시기하고 모함까지 했던 일부 장군들까지 이성가 장군을 지휘책임의 희생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이러한 반대의 목소리가 주효했는지 2차 공판이 있기 전에 이 사건을 선고유예로 매듭짓고 이성가 장군에게 빨리 전선으로 나가라는 말을 했다. 이에 이 장군은 자기가 누군가의 쇼에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유재흥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성가 사단장은 작전실패의 책임을 물어 군법에 회부되었다. 군법회의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주력을 이탈한 것은 마땅히 지휘책임을 져야한다’고 했을 때 그는 일체 변명도 하지 않고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나의 부하들에겐 책임을 묻지 말아 달라’고 당당하게 자기 책임임을 시인했다. 이 사단장에게는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전공이 참작되어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후일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총참모장의 배려로 집행유예가 되어 군단장까지 승진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성가 장군 참전기 영천 대회전> p269-279



나는 이성가 전임 사단장과 관계 장교들에 관한 군법회의가 열렸을 때 사단의 실상과 작전실패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시종 방청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 자신도 8사단을 지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 역시 많은 손실을 내게 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야 한다는 등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당시 상황을 분석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8사단은 50년 12월 5일 토산에 집결, 4일 동안 부대 정비를 하고 있어다. 9일 2군단장 유재흥 소장으로부터 "사단은 지체 없이 연천으로 이동하여 명에 따라 원주로 이동할 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사단은 연천을 향해 행군하던 중 군단 정찰기에서 "토산-연천 간 교량 10여 개소가 적 패잔병에 의해 파괴되어 차량기동이 불가능하며 적정은 알 수 없다"라는 통신문을 받았고 동시에 군단에도 보고됐다. 이에 유 군단장은 작전의 긴급성에 따라 전문(電文)으로 사단에 "사단장은 차량으로 먼저 연천에 도착하여 장차 사단이 수행해야 할 기동계획을 수립하고 주력은 부지휘관에게 지휘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이 사단장은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16연대장 유의준 중령에게 지휘를 일임하고 윤춘근 부사단장과 함께 포병을 비롯하여 환자, 중요보급품을 차량화하여 적정이 없는 시변리-개성으로 우회하여 연천에 도착했다.


이 무렵 연천 철원 일대에는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 1-2만 명이 제2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중공군 개입으로 아군이 후퇴를 개시하자 일제히 아군 후퇴병력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여 우리 사단은 이들의 엄청난 기습을 받게 됐다. 이들 패잔병 약 2개 연대는 사단이 행군할 토산 연천 사이에 흐르는 임진강 양안(兩岸) 절벽에 잠복하고 있던 중 사단이 아무런 경계책도 없이 강변을 따라 야간행군으로 접근하자 이를 완전히 포위한 후 기습했다. 돌연한 적의 기습에 사단은 대항할 대책도 없이 혼란상태에 빠져 각개별로 분산되고 말았다.


후위를 지휘했던 21연대장 장호강 중령은 “사단이 이동한다는데도 사전에 아무런 대책이나 협의도 없이 무조건 행군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전위는 16연대, 중앙은 10연대, 후위는 우리 연대가 담당하게 됐다. 후위에 섰던 우리 연대는 새벽 5시경 기습을 받고 완전히 분산 됐으며 나는 겨우 연대본부와 통신대를 이끌고 2일 만에 구화리로 빠져나와 이곳에서 1사단과 연결되어 사단 주력과 만나게 됐다”고 말하였다.


이번 피습에서 사단은 약 3분의 1이 넘는 병력과 장비의 손실을 냈으며 건제를 유지한 채 탈출에 성공한 대대는 거의 없었고 한다.


군법회의에서 “사단장이 아무런 대책 없이 주력과 이탈한 것은 마땅히 지휘책임을 져야한다”라고 했으며 이성가 전임 사단장도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으며 나의 부하에겐 책임을 묻지 말아 달라”라면서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이때 증인으로 나온 유재흥 군단장은 사단장과 중장비를 선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증언한 후 “이 사단장은 나의 명령을 따랐을 뿐으로 전적인 책임은 군단장인 나에게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재판은 그 중요성에 비추어 책임자는 극형에 처해질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는데도 서로 자기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주장에 대해 나나 방청객 모두 감동하여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단과 멀리 떨어져서 현지 상황을 알 수 없는 군단장의 조치와 현지 사단장과 연대장의 전술적 문제를 떠나서 오랜만에 볼 수 있는 상경하애(上敬下愛)의 정경에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끝내 이 사단장은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유 군단장의 간곡한 자기책임의 주장으로 무기로 되었으며 다시 전공이 참작되어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참모총장의 배려로 집행유예가 됐다.

이성가 준장은 사단을 떠나면서 나에게 "사단을 어지럽히고 떠나 미안하게 됐소. 훌륭한 사단이니 잘 키워주시오"라고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후일 소장으로 승진하여 군단장을 비롯한 군 요직을 두로 거쳐 1962년 3월에 예편하며 1975년 53세의 젊은 나이로 아쉽게도 세상을 떠났다.

<전쟁의 현장>  최영희 p145-146


덧글

  • 조은성 2011/11/17 16:16 # 삭제 답글

    '과' 보다는 '벌'이 지나치게 중하다고나 할까요.
    이런 식이라면 백선엽장군은 벌써 이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 금성천 2011/11/17 16:52 #

    한국전쟁 기간 주로 야전에서만 고생하던 장군들은 승리의 영광도 있지만 패전, 작전실패도 다반사였죠.

    그 중에서도 백선엽 장군이나 송요찬 장군 같은 분들은 운도 좋은 편인 것 같습니다.

  • Real 2011/11/17 17:20 # 답글

    하이고~ 신성모가 왠일로 저런 일을 했대요?ㅋ
  • 금성천 2011/11/17 17:42 #

    그러게 말이예요. 후임 최영희 장군이 횡성에서 참패했을 때는 면담도 거절했었죠.
  • 행인1 2011/11/17 23:38 # 답글

    지휘관이 먼저 떠나고 이동하던 부대가 적의 기습을 받아 피해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붕괴해버린 사례는 6.25 이후의 현대전에도 있더군요. 남베트남 2군단이라고...
  • 금성천 2011/11/18 11:43 #

    나라를 빼앗긴 군대의 비망록에서 본 것 같군요. 다시 한번 읽어 봐야지.
  • 명탐정 호성 2014/10/30 14:50 # 답글

    저 사람 실리 보고서에서 나온 제4연대장 이정일입니다. 훗날 이성가로 개명
  • 용감무쌍한 돌고래 2016/01/28 16:53 # 답글

    우연히 이 포스팅을 보고 제 블로그에 포스팅한 <한국전쟁과 이성가장군>을 소개합니다.
    아래, 포스팅은 이성가장군이 다시 현역에 복귀, 혁혁한 공을 세워 미 정부로 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행사 장면으로 이장군의 모습과 컬러로 구현된 사진이 매우 좋습니다.

    http://blog.joins.com/fabiano/13612110
  • 명탐정 호성 2019/10/17 23:00 #

    호오
  • 용감무쌍한 돌고래 2016/01/28 16:54 # 답글

    우연히 이 포스팅을 보고 제 블로그에 포스팅한 <한국전쟁과 이성가장군>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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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읽는뇌섹남 2019/05/18 11:28 # 삭제 답글

    이때 보면 한국군과 미군들 보다가 암 걸릴 지경
    맥아더, 정일권 총장이 똥 다 싸놓은거 이성가 사단장이 다 뒤집어 쓴 꼴 밖에 더 되나...
    이성가도 패전의 원인을 몰라 그냥 어이가 없어서 재판 당시 함구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40년 뒤인 중공군 부사령관 출신 홍학지가 쓴 항미 원조전쟁에서 알게 됐다 하네요.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더 무섭습니다.
    신성모는 진짜 간첩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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