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헌 중령 하극상 사건 한국전쟁

 

1959년 2월 18일 오후 6시경 보병 제28사단장 서정철 준장은 예하 제81연대 제1대대장 정구헌 중령이 발사한 7발의 45구경 권총탄을 맞고 무참히도 현장에서 절명하였다.


순직한 서 사단장은 전 법무부 장관 서상권씨의 손자이며 일본 중앙대학 학병 출신으로 가족은 부인과 1남 2녀가 있고 한편 정 중령은 평남 대동군 출신으로 육사 8기이다. 가족으로는 모친과 부인 그리고 2남 1녀가 있다.


가해자 정 중령은 아주 우수한 장교로서 보병학교에서도 특대생이었고 또 미국 보병학교까지 수료한 장래 유망한 장교였으며 사단장이 그의 예하 대대장 중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부하였다고 한다.


검열부대로 선발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으며 이날 정 중령은 전술 이론면에서 사단장에게 공박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발작적으로 이런 사고를 저지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월 20일 김득모 육군 헌병감은 그 진상을 정식으로 신문에 발표했다.


미 1군단장과 백인엽 6군단장이 19일에 대대수색정찰시범을 보고 싶다는 요청이 있어 서 사단장은 사건 당일인 18일 오후 2시 시범장소인 1대대 뒷산에 이르렀다. 정 중령은 분대 단위로 시범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서 사단장은 화력증강을 위해 소대 단위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대장 정 중령에게 말했다.


그러나 정 중령은 지형정찰을 새로 해야 한다, 날이 어두워 내일 준비에 시간이 없다, 화력증강은 위력정찰이지 수색정찰이 아니라고 의견을 말했다.


훈련병들 앞에서 정 중령의 이와 같은 대꾸에 심히 불쾌해진 사단장은 “이 새끼, 내가 할 게 없어서 너한테 교육 받으러 온 줄 아느냐”고 매우 흥분하여 지휘봉으로 정 대대장의 배를 가볍게 서너 번 꾹꾹 찔렀다. 불쾌감을 느낀 정 대대장은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너무하지 않소?”하고 또다시 대꾸했다.


더욱 불쾌해진 사단장은 장갑 낀 손으로 정 중령의 얼굴을 후려 때려 안경이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 정 중령이 “각하 진정하십시요”하자 격분한 사단장은 “이 자식아, 잔소리 말고 내려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연대장 송광보 대령이 “각하 그러시지 말고 대대장실로 가십시다.”고 권하여 사단장은 고지에서 내려왔는데 내려오면서 서 사단장은 그의 소제(蘇製) 권총을 따각하고 장전했다. 아래 있던 정 중령은 그 소리를 듣고 먼저 대대장실로 들어왔고 뒤이어 사단장이 노기를 띤 얼굴로 방에 들어서면서 “넌 뒷문으로 나가!”하고 고함쳤다.


정 중령은 뒷걸음쳐서 뒷문으로 나가면서 권총에 장전을 했다. 정 중령의 감정은 격화했다. 사단장은 정 중령이 장전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성큼성큼 뒤쫓아 방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꽝꽝꽝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3미터 거리에서 정 중령이 처음 쏜 3발에 서 장군은 막사의 배수구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범인은 계속해서 남은 4발을 쏘아 전탄을 명중시켰다.


범행 후 정 중령은 사단장 지프를 타고 약 1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군단까지 와서 주번사령관에게 자수했다. 이 사건으로 대대장 정 중령은 물론 연대장 송 대령도 구속됐다. 그것은 처음 3발과 다음 4발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있었음에도 대대장을 꾸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혀 제지하려고 하지 않았고 범인이 군단에 자수했을 때까지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김 헌병감은 “오랜 군인생활의 종말이 이렇고 또한 사단장을 사살한 내가 어떻게 돼서 쏘았는지 모르겠다. 형에 대해서는 감수할 작정이다.”라는 정 중령의 말을 부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외에 큰 충격을 준 비운의 서 사단장은 고집쟁이고 엄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남의 빈축을 받을 만큼 성격상이나 인간 행위에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과묵한 편이나 그렇다고 전연 사교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점잖다는 평을 듣고 있는 그는 일에 대해서는 열성적이며 세밀하였다. 그의 동료 중에는 이러한 그의 고집과 엄격한 성격이 같이 고집 많고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으려는 정 중령과 맞부딪혔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 아닌가 보는 측도 있었다.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무척 늙어보였으며 최근 돈암동에 꽤 큼직한 집을 하나 장만하였다. 그러나 항간에는 공병대원이 이 집을 수리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한때 말썽도 있었다. 그는 집 문제로 말썽이 났을 때 통영 집을 처분하여 구입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가정환경이나 모든 면에서 그는 순조로운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정 중령은 수재형이면서 정의파였고 이것이 조성되어 일종의 불평파이기도 했다. 착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그의 사생활은 깨끗하였으며 목적하면 그것을 꼭 수행하고야 마는 성격이었고 자신의 주장을 좀처럼 굽히지 않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그의 성격에다 우수한 중견 장교로서 육본 작전국과 정보국에 다년간 근무한 바 있으며 최근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하고자 맹렬히 공부하고 있었던 중이므로 사건 당시 사단장이 그가 준비해 놓은 부대 검열 준비에 있어 “편제가 잘못 되었다.”고 시정을 명령하자 즉석에서 “그것은 각하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라고 능히 반발할 만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무척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하며 또 남을 깔보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여 교우관계도 비교적 범위가 좁았다고 한다.


그는 평양에서 일제 때 일본인만 다니는 제일중학 출신으로서 해방과 더불어 단신 월남하여 고생 끝에 군문에 들어가 오늘날에 이르렀고 6.25 진격 당시에 북진하여 가족을 데리고 월남하였다.


야전에서 오랜 경험을 가진 모 장성의 말을 빌면 정 중령은 사건 당시 전쟁 중의 발작적인 망상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 중령은 6.25 전란 때 소대장, 중대장 등을 전전하였는데 그런 사람은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 정신적인 어떤 충격을 받으면 전쟁 망상에 걸리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현재 육군의 고급장교에도 그러한 류(類)의 사람들이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그와 같은 사례가 많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예로는 어떤 수색중대에 근무하던 도망병이 이와 같은 발작으로 전선에서 총을 쏘듯이 김포 가두를 휩쓸며 백환 이백환의 강도행위를 위해 살인 행각을 해온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5월 14일 정 중령은 대구 교외에서 총살형이 집행될 예정이었으나 “고 서준장 살해사건에 새로운 진실이 있다”는 이유로 재심을 청구하게 되었고 사형집행은 무기연기 되었다.


그 새로운 사실이라는 것은 정 중령이 대구 형무소에서 가족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편지에서 정 중령은 “동 사건에 있어 현재도 건재하고 있는 상사와 동료에게 해를 끼칠까봐 말하지 못한 사연이 있다”고 전제한 다음 “공판을 통해 이것을 발설치 않았던 것은 남을 물고 들어간다는 세상의 오해를 받기 싫어서 교인답게 체념한 것인데 사태가 이에 이르고 또한 수감생활을 통해 조용히 생각해보니 침묵을 지킨다는 것이 국가를 위하여 이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으며 앞으로 이런 운명을 당하게 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말하기로 결심하였다”고 전하여 왔다는 것인데 그 새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 변호인단이 대구형무소에 출장 가기로 되었다.


그러나 그가 발설한 새로운 사실을 끝내 함구하고 말하지 않은 채 그의 인생에 최후의 날을 맞았다.



과거 일본 군대도 하사관이 병사에 대한 기합은 암암리에 허용되었지만 장교간의 기합이라는 것은 보지도 못하였고 들은 바도 없다. 소위 장성이라는 사람이 장교의 따귀를 때린다는 것은 일찍이 이 땅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왜 악취가 풍기는 일본 군대의 기합마저 옳게 받아들이지 못했을까.......군대라는 곳은 소나 말처럼 부리는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조국 수호의 사명을 지닌 국민의 성당(聖堂)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정신적 혁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간 재판> 태윤기 변호사 p304-320




당일 사단장과 대대장의 의견 대립은 극히 사소한 일로 비롯된다. 첫째는 시범병력과 화력을 증강해서 분대규모를 소대 병력으로 증강하자는 것이 사단장의 의견이고 대대장은 지금에 와서 계획변경은 너무 늦다고 반대의견을 낸 점과 미군사령관에게 설명하는 용어 중 정찰을 patrol로 하느냐 reconnaissance patrol로 하느냐 인데 사단장은 후자의 사용을 명했고 두 번씩이나 도미유학을 다녀온 대대장은 그것은 ‘역전(驛前)을 역전 앞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보병용어는 최근에 와서 patrol로 통일해서 쓴다.’고 반대한 점이다.


서 준장의 성행은 차치하고 일제 때 대학을 다닌 학병 출신이라는 자부심으로 공연히 자기의 의견을 강력히 주장한 것 같았으며 특히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지휘봉으로 대대장의 복부를 수차 찔렀고 나중에는 가죽장갑을 낀 주먹으로 대대장의 안면을 구타하여 안경이 떨어졌으며 거기에다 소련제 권총을 장탄까지 했으니 정 중령의 격분과 피해의식, 그리고 자기보호의 위기감은 절정에 달했을 것이다.


정 중령 사건만 해도 사단장이 폭행을 하지 않았던들 이와 같은 대참사는 없었을 것이고 피차가 젊었던 탓(서준장 39세, 정중령 34세)도 있었다. 후문에 의하면 36세의 젊은 군단장의 극성이 서 준장을 노이로제 상태로 몰아 이 불행한 사건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 면식은 없었으나 정 중령이 동기생인 줄 알고 새로운 공감과 비창(悲愴)함을 가슴 깊이 느끼면서 정중히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나는 무거운 발길로 주번사령을 하번(下番)했다. 서 준장과 동기생인 존경하는 김득모 헌병감의 미묘하고 착잡한 시선을 뒤로 느끼면서.......


이 사건이 민간인 사회에서 일어났다면 최소한 극형은 면했을 것이다. 정당방위의 충분한 주장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에서 직속상관 살해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적전반역이 아닌 이상 극형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어떻게 하던지 구명 운동을 펴 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비극이었다.


1년 후에 일어난 숙군 운동, 그리고 5.16은 결코 이 정 중령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것은 나라를 지켜다는 자부심에 대한 너무나도 불공평한 대접에 대한 반항과 나름대로의 정의감의 구현에, 현 질서의 전복(顚覆)과 자연히 그 뒤를 이은 권력 장악과 그 유지를 위해, 군부 주동세력의 순차적이고 인과(因果)적인 행로가 여기에 암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자명 동기(당시 육군 헌병감실 근무)의 회고 <노병들의 증언>p323-325




28사단이 미1군단 작전지휘로부터 해제되어 6군단 예하로 들어온 지도 어느덧 8개월여가 지났다. 그간 6군단장과 28사단장 사이의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사단은 군단으로부터 각종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만큼 큰 것이었다.


그 당시 6군단장 예하에서 근무한 지휘관이면 평소 6군단장이 예하 지휘관에게 음성적인 요구가 있었을 것으로 믿어지나 그가 요구한대로 순응하지 않았던 지휘관에게 유무형의 보복이 뒤따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두 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갔으며 그 당시에는 하사관 확보문제로 사단에 대한 압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도 높게 밀어닥쳤다.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분대장 요원을 비롯한 하사관 확보 문제는 군의 골칫거리였다. 신분 및 보수, 근무환경 등 여건이 일반사회에 비해서 현격한 격차가 나는 상황에서 하사관을 지망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의무복무기간만 끝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제대임박자에게 홍보, 설득, 회유 심지어는 가정통신을 통한 부모 설득 등 갖은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도 확보목표에 훨씬 못 미칠 수밖에 없었고 상급부대 지휘관의 심한 책망과 독촉에 못 이겨 반강제적으로 지원케 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노출은 안 된 일이기는 하나 강제로 지원케 된 자들 중에는 중대장실이나 대대장실에 총기를 들고 와 하사관 지망을 취소시켜 주지 않으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사건들이 여러 건 일어났었다.


그러나 군단에서는 독촉전화가 빗발치듯 하루에도 몇 번씩 사단장 앞으로 걸려왔다. 그것도 군단장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군단 참모들을 번갈아가며 시켜서 말이다. 나는 군단의 시달림에 한숨짓는 사단장을 볼 때 불쌍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남달리 일의 성취욕이 강하였던 사단장은 무엇이든지 1등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분이어서 그런지 지휘검열 등 제반분야에서 항상 전군에서 1,2등을 차지하였다. 그러다 보니 부하들에게 좀 과다한 강압과 기합이 뒤따랐던 것이다. 참모나 대대장 중 누구나 한두 번 정도는 인격 모욕을 느낄 정도의 기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단 내에서는 사단장의 성격이 그러려니 하고 그때만 참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반면 업무처리는 공평무사하였고 부하들을 몹시 사랑해주는 편이었다. 개인 신상에 영향을 줄 기록상에 남을 처벌은 말만 그랬지 좀처럼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처벌기록을 보관해 두었다가 연말 쯤 어떤 계기에 공개석상에서 이번 한번 만큼은 마지막으로 용서하니 더욱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사병들의 정량급식을 강조하였고 이를 어기는 지휘관은 용서하지 않았다.


사건 후 정구헌 대대를 검열한 결과 타 대대는 막사 공사 및 대대 훈련시설 등 그 당시 돈으로 적지 않은 부채와 보급품의 부족이 있었으나 정 중령의 대대는 깨끗하였다. 가정 살림 역시 어려워서 가족들의 고생이 컸다. 또 한 가지는 하사관 지망자 확보문제에 대한 정 중령의 견해는 자기는 대대장직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지망하지 않은 사람을 양심상 도저히 반강제적으로 지망케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정구헌 대대의 지망자 확보율이 사단 내에서 최하위였던 것이다.


사단장과 대대장 간의 쟁점은 영어 단어 문제를 가지고 의견이 격돌하여 발생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하사관 확보 문제 때문에 일어나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처음에는 영어 단어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이러한 교리문제를 가지고 그와 같은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사단장이 “그러면 좋다. 훈련장으로 가보자. 그런데 자네 대대는 왜 하사관지망자 확보성적이 나빠.......”하니까 대대장이 대뜸 전에 나한테 한 말과 같이 “저는 못합니다. 대대장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원하지 않는 사람을 반강제적으로 지원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부사단장이 쌀을 달라는 것을 즉석에서 거절한 대대장의 강직한 성격으로 미루어 봐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사단장 역시 군단에 매일 시달려 온 현안문제라 특히 정구헌 대대의 확보성적이 부진한 터에 대대장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역시 이 문제만큼은 사단장도 양보할 수 없었다. “왜 못해” “못 합니다” 이리하여 서로의 감정이 격돌하여 그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사건 발생 2일 내지 3일 후 6군단장이 대대장 이상 지휘관과 사단 참모들을 사단 회의실에 집합시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핵심은 군단장은 절대 하사관 지원자 확보문제에 대해서 사단에 강요한 적이 없음을 여러 번 강조하고 나섰다. 정 대대장이 연대장과 함께 동행하여 군단에 자수할 단계에서나 재판과정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것은 군의 명예와 군단장의 책임문제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야기될 것을 염려하여 문제를 축소 조작한 것으로 본다.


이상 정구헌 중령 사건의 고찰을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사단장과 대대장 두 사람의 순간적인 격정을 참지 못한 성격상의 결함과 사고의 근본적인 동기를 제공한 강압적이고 비합리적인 군단장의 지휘결함에서 연유한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야기된 사건이다.


이 두 가지 요인 중 근본요인은 사고의 근본 동기를 제공한 군단장의 지휘결함이다. 만약 군단장이 사단장에게 하사관 요원 확보에 대해서 계속적이고 무리한 압력을 가하지 않았던들 이 문제가 훈련장에서 제기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경악할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책임은 그 당시 군단장의 보직권자인 군 고위당국자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할 문제이다.


끝으로 국가적으로 더 공헌할 수 있었던 유능한 인재를 잃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비명에 간 두 분의 명복을 빈다.

정태식 동기(당시 28사단 작전참모)의 회고 <노병들의 증언>p325-329


덧글

  • band 2012/02/28 17:47 # 삭제 답글

    고2때 영어선생님(갑종출신 교련에서 영어교사로 시험봐 넘어온 요상한 경력의)이 심심하면 들려주시던 예전 군대생활예기중에 들은 것이내요. 그분예기로는 지역출신문제(당시 이북출신장교들의 군내부입지약화)도 크개 작용했다고 하셨죠.
  • 금성천 2012/02/28 19:39 #

    저 사건 이후로 일부 고위 장성들의 횡포가 약간 완화되었다고 합니다.
  • 조은성 2012/02/28 18:06 # 삭제 답글

  • 금성천 2012/02/28 19:43 #

    서정철 장군 사진을 올리려고 어느 책에서 보았던가 하고 찾다가 포기했는데 최갑석 장군 책이었군요.
  • 행인1 2012/02/28 20:47 # 답글

    보도된 내용 이상의 것이 있었군요. 그나저나 하사관(부사관) 강제지원 문제 때문에 '총기'를 들고 중대장, 대대장을 찾아뵙는 군대라니...;;;
  • 금성천 2012/02/29 12:05 #

    당일 의견 충돌은 시범을 분대 단위로 하느냐 소대 단위로 하느냐, 어느 영어 단어를 사용하느냐로 촉발되었지만 군단의 무리한 하사관 확보문제로 이미 심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죠. 저 6군단장도 박모 사단장 배를 꾹꾹 찌르고 정모 사단장에게도 부하들 앞에서 모욕을 주던 분이고.

  • 조은성 2012/02/28 21:01 # 삭제 답글

    뭔가 댓글을 알려고 했지만 그저 씁쓸한 생각만 납니다...
  • 금성천 2012/02/29 12:08 #

    사실 위 3분의 기록을 다 올리지는 못하고 중요부분만 발췌해서 올렸습니다.

    당시 신문기사도 일부 검색해 봤는데 정구헌 중령의 모친은 영결식 가서 분향을 하고 서정철 준장의 부친은 최대한의 관용을 호소하더군요.
  • 2012/02/29 19:0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금성천 2012/03/02 10:52 #

    월간조선 93년 10월호에 '백00 흥망사'로 관련기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위 정태식 동기의 회고에도 그 백장군의 강압이 주요인이 되었다고 하고 있죠. 여하간에 말썽 많은 사람입니다.
  • 2019/08/28 14:5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비도승우 2012/03/01 03:46 # 삭제 답글

    정구헌 중령은 후일 어찌되었나요?저희 친할아버지가 저 당시 한병중령으로 계셨는데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도 궁금하네요. 아무튼 각설하고 제가보기엔 물론 지금으로서는 상상할수 없는일이지마는

    저 당시 군장교들의 연령대를 보면 알수있을둣 합니다. 올리신 자료에도 나와있듯 장교들의 나이차가 별로 안나고

    계급차는 더러 나는수가 많으니 특히나 능력이 없는데 상관인 장교는 서열우위확립을 위해 오버해서 군기를 잡았을것으로

    생각되며 상대적으로 능력이 있는데 후임인 장교는 나이차이도 얼마 안나는 경우엔 그런 행위들에 심한 반발심을 느꼈을것입

    니다. 5.16의 격발원인중에 하나로도 충분히 꼽힐만한 이유가 충분하겠군요. 훗날 12.12때 전두환을 위시한 육사11기가 선배기

    수들이나 갑종 혹은 군사영어학교등 비육사출신들에대해 가졌던 엘리트의식이 그들을 뭉치게했던걸보면 충분히 납득이 갑니

    다. 그리고 살인은 정말 우발적으로 욱해서 일어난다는 사실도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제입장에서도 충분히 살의를 느낄만한

    일입니다. 또한 사단장의 입장에선 마찬가지로 그럴만한 사유이구요. 다시는 저런 불행이 없길 빕니다. 착잡하군요.
  • 금성천 2012/03/02 11:03 #

    그 해 5월 20일 칠곡군 관음동 돌고개의 사형장에서 총살되었습니다.

    그 전에 김창룡 소장 암살 사건에 관여한 허태영 대령이 역시 총살된 곳이라 합니다.
  • 조은성 2012/03/01 21:24 # 삭제 답글

    앞서 8사단, 7사단 시절의 이성가, 정진 두사람의 모습도 비슷한 풍경이었지요.
    실상 강한 성격의 두사람이 정면충돌한 모습이고, 만약 중간에 완충작용을 할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비극적인 결말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 금성천 2012/03/02 11:16 #

    이성가 장군도 정진 연대장을 만나러 갈 때 권총 안전핀을 풀었다고 했었죠.

    서 사단장이나 정 대대장이나 다소 드센 분들 같습니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조금만 성질 죽이고 중간에 연대장이나 참모 중에 중재 완충 역할이 있었다면 최악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명탐정 호성 2019/08/28 14:50 #

    이성가(이정일)이 바로 실리 보고서에 나온 제4연대장이지요
  • 금성천 2012/03/02 11:56 # 답글

    태윤기 변호사의 글 중에서 일부생략했던 부분을 노란 바탕 글로 추가하였습니다.
  • ... 2012/12/27 10:04 # 삭제 답글

    돌아가신 저희 외할아버지 얘기네요...
    자세한 얘기가 궁금했었는데 감사합니다. 엄마는 할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조개처럼 입을 다무셔서요.
  • ,,, 2013/01/24 22:44 # 삭제

    서정화 장관님에게 외손자뻘 되시네요. 훌륭한 가문 태생이십니다;;;;
  • 서준장님외손녀 2016/11/18 00:53 # 삭제

    제 외사촌 중에 이런 글 쓸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중령님 외손주이신가 보내요... 그냥 씁씁하네요... 외할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셨다면 어땠을까 문뜩 문뜩 떠오르곤 하죠...
  • GoArmy 2014/05/30 16:14 # 삭제 답글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하극상사건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백인엽 군단장의 강압적 하사관 차출이었다고도 하는데...
    일부에서는 한미연합사의 "미밀 숙군작전"의 일부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사망한 서준장과 가해자인 정중령이 뛰어난 군인이었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고
    표면적으로는 쌍방이 모두 "욱"하는 성격 때문에 순간적으로 폭발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드러난 이유일 뿐이라고 봅니다. 기밀숙군작전은 물론 "심리전"을 뜻합니다.

    추측컨대 두 분다 성품이 강직하고 원리원칙주의자였으며
    친일(친미)성향이 적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숙군대상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비밀 숙군작전이 진행됨에 따라
    군 내부에는 결국 친일 또는 친미사대성향이 강한 지휘관이 주도권을 잡게되었고,
    결과적으로는 1961년 516 쿠테타의 배경이 된 셈이죠.
    아마 서준장과 정중령 같은 군인들이 이런 사건으로 희생되지 않고 군 내 지휘관으로 있었다면
    1961년 516 쿠테타는 실행되지도 못했거나 아예 초장에 실패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 많습니다.

    두 분의 죽음은 유가족에게는 물론, 대한민국의 근대사에서 너무나 안타까운 사건이었다고 봅니다.
  • 명탐정 호성 2019/08/28 14:48 # 답글

    전법무부장관 서상권씨별세 https://news.joins.com/article/1161825

    사단장의 할아버지는 1968년에 별세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손자가 자기보다 먼저 사망(피살)했으니 멘탈이 붕괴되었을거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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