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첫날의 무초 주한 미국 대사 한국전쟁

6.25가 터졌을 때 주한 미국 대사는 존 J 무초였다. 1950년 6월25일 새벽 8시 그는 전화벨 소리에 일어났다. 副대사인 에베레트 프란시스 드럼라이트였다. “미 군사고문단이 새벽에 38선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해왔습니다. 대사를 깨우지 않은 것은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한 뒤에 보고하려고 한 것입니다”


무초는 걸어서 5분 거리인 대사관으로 향했다. 대사관은 반도호텔에 있었다. 도중에 UPI의 빌 제임스 기자를 만났다.

“대사님 아침부터 어디를 가십니까?”

“38선에 무슨 일이 일어난듯한데 챙겨보시오”

제임스 기자는 이 말을 듣고 제1보를 날렸다. 세계적인 특종이었다.


무초 대사는 오전 9시에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워싱턴의 국무부로 보냈다.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도 전달하도록 했다. 무초 대사는 서울에 주재하는 다른 나라 대사들에게도 전황을 알려주었다.


이날 무초 대사는 경무대로 자주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최신정보들을 알려주었다. 이 대통령도 여러 통로로 보고를 받고 있었으나 무초의 보고가 더 정확했다. 그때 미군은 약500명의 군사고문단을 한국군의 여러 부대에 파견해놓고 있었다.

오후에 경무대로 들어가니 이승만 대통령 옆에 신성모 국방장관이 있었다. 이 대통령이 “방금 국무회의가 열렸다”고 말했다.

“내가 공산군에게 붙들리면 국가적 재난이 된다는 거야. 내가 먼저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무초 대사는 말렸다. “한국군은 열세에서도 지금 잘 싸우고 있습니다. 밀리고 있으나 부대 단위로 항복한 곳은 없습니다. 서울에서 각하께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을 전선의 부대가 알게 되면 사기가 떨어져 무너질 것입니다. 서울을 떠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어야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잡혀선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 시간쯤 설득하다가 지친 무초 대사는 일어서면서 말했다고 한다. “각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6월26일 오후 경무대에 올라간 무초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기 위해 두 대의 기동차를 준비했다는 말을 들었다. 李 대통령은 27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내려갔다. 무초 대사에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무초는 대단히 화가 났고 이 대통령은 미안해했다.


무초 대사는 이 대통령의 오스트리아인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대통령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무초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번 들르세요.”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무초 대사가 이 대통령을 찾아가 한 시간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그 사이 대통령은 생각하고 있던 話頭(화두)를 꺼냈다. 무초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줄 수 있었다.


1971년 1월과 2월에 은퇴 중이던 무초 대사는 워싱턴에서 ‘역사 기록을 위한 육성증언’에 응하여 위의 秘話를 소개했던 것이다. 무초 대사는 “그날 한국군은 기습을 당하고도 참으로 잘 싸웠다”고 말했다. 북한군은 당일에 서울에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북한은 전쟁을 일으킨 이승만 정부가 북한군의 반격으로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국민들이 통일을 환영하고 있다면서 상황을 기정사실화하여 미국과 유엔의 개입근거를 없애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초 대사는 “한국군의 조직적인 저항과 전선의 暴雨(폭우)가 한국을 구했다”고 말했다. 릿지웨이 장군 등 미군 측의 회고에는 한국군의 무능과 무책임성에 대한 비판이 많다. 한국사정을 잘 아는 무초는 동정적이다. 단기간에 건설된 한국군은 미국이 무기를 제대로 대주지 않았는데도 잘 싸웠고, 이것이 대단하다는 이야기였다.


덧글

  • BigTrain 2012/08/21 19:19 # 답글

    저 때의 추태가 맘에 걸려선지 리 태조는 유독 무초를 싫어했다죠..
  • 금성천 2012/08/22 14:51 #

    국방부장관, 내무부장관 임명하는데도 미국이 싫어하는 하는 사람은 안된다고 하니 태조께서도 울분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어떤 때는 밀어붙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양보하기도 하고.

    국방부장관에 이범석이냐 신성모냐 뻔한 답이 나오는데도 미국은 신성모를 선호했으니.
  • 조은성 2012/08/21 19:48 # 삭제 답글

    적이 쳐들어왔으니 국가의 상징인 국가원수가 피신하는 것은 당연함...
    문제는 국회나 다른 정부기관들은 놔두고 대통령 홀로 피신했다는...
    덕분에 피난도 못가고 붙잡힌 국회의원이나 공무원들이 많았지요...
  • 금성천 2016/01/16 11:53 #

    요즘 사학자들 책 읽다보면 선조와 이대통령이 백성들 버리고 도망쳤다고 비아냥대는데 그럼 그냥 싸우거나 앉아있다 잡혀 죽으라는 것인지.

    공산당 무서운 줄 아는 사람들이나 눈치 빠른 사람들은 북한군 오기 전에 많이 한강을 건넜죠. 대부분 시민들이나 최영희 장군 부친 같은 경우 '그래도 동족인데' 하고 남았다가 빨갱이들한테 질려버리고.
  • 실버스타 2012/08/21 22:05 # 삭제 답글

    북한군이 6월25일 당일에 서울에 들어올수도 있었다니
    무쵸대사도 6.25에 대해 아는게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침계획인 선제타격계획은 북한2군단의 고속기동부대(모터찌크연대)가 강원도 홍천으로 우회하여 수원으로 진출하여 대기하고
    북한1군단이 서울을 공략하여 후퇴하는 국군을 수원에서 대기하는 모터찌크 연대가 섬멸하여 국군의 전력을 완전히 와해시키는 계획이 아니겠습니까?

    모터찌크 연대가 6월27일까지 수원에 도착하고 6월28일 북한1군단이 서울을 점령하는 계획이죠.
    처음부터 서울 점령계획은 6월28일입니다.
    문제는 북한2군단 전차가 6월27일 말고개에서 격파되는 바람에 길이 막힌것이죠.
    그들은 춘천으로 방향을 돌려 남하 하느라 타이밍이 안맞아 1군단과 2군단이 공조되지 못했습니다.

    선제타격계획이 완전 실패한 터라 이 전쟁을 계속해야 되는지 혼란이 생겼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도 3일동안 우왕좌왕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 금성천 2012/08/22 15:46 #

    저 역시 이대통령이 27일 새벽에 서울을 빠져나간 것이 그리 이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무초는 미군사고문단의 통제자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고 많이 노력햇었죠.
  • 2012/08/22 16: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금성천 2012/08/22 16:16 #

    이승만 대통령의 탈출에 국군도 모르고 미군도 몰랐다는 건 대통령 일행이 도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테러를 당할 수도 있고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목포에선가요? 정극모 해군 대령에게 비서가 가서 여기 대통령 와 계신데 배를 좀......
  • 비도승우 2012/08/22 21:17 # 삭제 답글

    그렇쵸.. 지금의 아프리카 후진국가수준의 경제력과 모든체계가 어설펐던 당시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역사의 단면이죠. 제가 알기로는 그래서 박정희 전대통령이

    유사시 신속한 시민소개와 한강이남 지역의 증원병력 전개를위해 한강에 다리를 많이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 갈천 2012/08/23 12:48 # 답글

    1. 예전에 길잃은 어린양이란 분이 블로그에서 이글을 소개하고 이승만을 증오했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승만이 서울을 도망 갈 시각에는 아직 국군이 축석령을 지키던 때였다면서...
    아니 국군이 축석령을 지키던 때가 이승만이 서울탈출 시각이 아니라 이승만이 무쵸대사의 서울탈출을 만류하던
    때였는지도 모릅니다

    2. 그런데 그 후 이승만의 비밀리에 서울탈출하려는 결정이 당연히 옳았다는 어느분의 댓글을 보았습니다.
    신동아 2007-08-27 특명 “북한 급변 사태시 10시간 내 평양 점령!”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히틀러가 전격전으로 오스트리아를 침공한지 하루만에 오스트리아와 합병을 선언하고 한달만에 오스트리아 주민을
    상대로 국민투표를 하여 높은 지지율로 이 합병을 승인하도록함으로 주변국도 개입할 명분이 없어 방치할 수 밖에
    없었던 사례이지요.

    3. 그런데 생각해보니 프란체스카 여사가 오스트리아출신이네요. 이점을 고려한다면 이승만대통령의 당시 행적을
    충분히 이해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카페 <우남 이승만과 건국사>의 '영부인의 6.25비망록'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은 6월27일 새벽2시
    서울을 사수하려다 주변의 피신권고로 서울을 탈출 했다고만 말하고
    6월27일 새벽 이전에는 서울탈출에 대한 논의 여부가 없습니다. 아쉽네요.
    http://cafe.daum.net/syngmanrhee
  • 금성천 2012/08/23 15:46 #

    27일 새벽 2시면 이미 의정부가 떨어지고 창동(쌍문동) 전투가 있기 직전이죠. 서울 함락은 시간문제니까 대통령의 탈출로서 시기적으로 이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사례는 흥미롭네요. 다시 자세히 읽어봐야겠습니다.
  • 갈천 2012/08/23 19:15 # 답글

    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처럼 이승만대통령과 국회의원 상당수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
    어용국회를 열고 남북 적화통일을 결의한다면...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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