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근 장군은 정말 6.25 첫날 한강 방어를 주장했을까? 한국전쟁

6.25 개전시 방어계획에 의한 후방 사단의 전선 투입

 


나는 이형근 장군의 6.25 첫날 회고록 부분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결과를 보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6.25 첫날 육군본부에서 한강선방어를 제안했다는 그의 주장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의 한강선 방어 주장이 거짓이라는 첫 번째 근거는 그의 회고록이다.  관련 부분을 자세히 읽으면 알 수 있다.


6월 25일 아침 10시경 전화를 받아보니 김백일 참모부장의 숨 막힐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2사단은 시급히 의정부로 집결해 주십시오. 긴급사태가 났습니다.”


나는 우선 가장 출동하기 쉬웠던 5연대 2 대대만을 인솔하고 오후 2시 30분 기차편으로 북상했다.


A. 제 2대대를 의정부 아닌 노량진에 집결시키고 후속 부대 역시 이곳에 축차적으로 합류하도록 조치한 다음 나와 제 2대대만 한강을 건너 용산 육군본부로 달려갔다.


B. 그때가 오후 6시, 육본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그 때 이미 수도 서울의 방어가 시기적으로 어렵게 됐다고 직감했다. 한시 바삐 전장에서 혼전중인 국군을 후방으로 이탈시키고 후방 3개 사단을 노량진 영등포 지구에 추진시켜 한강선에서 질서 있는 반격작전을 펴야 할 것이었다.


C. 그 때문에 나의 병력은 한강 남쪽인 노량진에 집결시켰던 것이다.



이상은 이형근 회고록의 6.25 첫날 오후 6시 육본에 도착했을 때 묘사이다. 자세히 다시 한 번 읽어 보라.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문장이 작위적이고 꾸며낸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육본에서 “2사단은 의정부로 집결하라”고 하면 의정부로 가면 된다. 그런데 그런 명령을 받은 사단장이 중간의 노량진에서 멈추고  병력을 집결시켰단다. 세상에 이런 군대, 이런 지휘관도 있는가?


A, B, C 문장에서 B가 먼저 있고 A가 있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황을 알아보고 결정을 했다면 그런대로 그럴 듯 해 보일 것이다. (육본의 의정부 집결 명령에 2사단장 자의의 노량진 집결이라는 주장이 우선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런데 이형근은 육본에 가서 상황도 파악하기 전에 노량진에 부대를 집결시키고 육본에 가서 본즉 자기 직감(?)이 맞아서 노량진에 부대를 집결시켰던 것이라는 용한 점장이 같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것이다. C는 자기의 직감(?)이 정확(?)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글이다.


이 정도 설명이면 이형근 회고록의 저 문장은 사실의 기록으로는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중에 결과를 보고 꾸며낸 이야기로 봐야할 것이다.



두 번째 근거는 6월 25일 그의 주장이 그의 언행을 관찰 기록한 3자들의 증언과 너무도 다르다는데 있다. 6월 25일 오후 2시 30분부터 그날 밤까지 그의 언행을 보고 들은 3자들의 이야기들을 보자.


우리 기자들이 이날 하오에 이형근 사단장과 함께 기차로 상경했는데 이 준장은 상당히 자신 있는 표정이었어요.

연합신문 이지웅 기자 <민족의 증언 1권> p63-64


사단장이 기차로 상경한다기에 우리 일행은 모내기 취재를 대충 끝내고 그와 함께 열차에 올라타 상경하게 되었는데 그는 열차 안에서 가진 일련의 기자회견에서 “만약에 전쟁이 붙는다면 점심은 평양에 가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 가서 먹겠다.”라고 하기에 실상 전쟁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연합신문사 이지웅 기자 <한국전쟁사1권 개정판> p603


북상 도중 조치원에서 이형근 준장(2사단장)이 지휘하는 대대 병력을 가득 태운 열차를 보고 “정말 전쟁이 났구나.” 생각했다. 이충환 의원은 그곳에서 이 사단장과 만나 잠시 전세에 관해 들어보았는데 “격퇴할 수 있겠지요.”라는 대답을 듣고 흐뭇했다. 

<민족의 증언1권>p34


6월 25일 밤 9연대 본부 막사는 2사단 지휘부가 차지하게 되었다. 밤 12시경에는 이형근 준장이 그의 참모와 미군 고문관들을 대동하고 9연대 연대장실에 들어와서 즉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때 전방 상황을 목격한 장교로서 김중위가 부름을 받고 사단장 질문에 응하였다. 김중위는 그가 겪은 몇 가지 모습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웃지 못할 넌센스!‘ 어쩌면 그렇게 입 속에서 뇌까렸을 성 싶은 비웃는 듯한 가느다란 웃음기가 입가에 번지다가 바로 콧방귀를 끼면서 “흥! 데데한 녀석들 같으니.......”하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2사단장의 작전 구상은 극히 명백한 선으로 지도 위에 그어졌다. 예하 2개 연대가 포천 가도를 경계로 양쪽에서 진격하여 6월 26일까지는 38도선을 돌파하고 저 멀리 38도 5부선까지 북진한다는 것이다.


이 장군의 야심찬 구상은 작전계획으로 수립되어 즉각 예하부대로 날려졌다. 이 장군은 어깨를 뒤로 제치고 앞가슴을 펴고 높은 목청으로 위엄 있게 그리고 확고하게 한국말로 외친 다음 유창한 영어로 자신이 직접 통역하는 것이었다.


“최초 공격제대는 내일 아침까지 38도선을 압박하고 내일 아침부터는 예비대가 오전 중으로 38도 5부선까지 진출할 것임” 

헐벗고 굶주린 공산당 유격대들을 오합지졸처럼 몰아치던 솜씨가 버릇처럼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전차를 앞세워 돌진하는 인민군 전력을 보잘 것 없는 빨치산들의 전력에 겨누어 평가하는 오류에서 빚어진 착각이라도 일어난 것이 아닐까?


미군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는 듯한 눈치를 보이는 것을 김중위는 놓치지 않았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수기 전장> 김영길 중위 7사단 9연대 작전장교 p24-26


6월 25일 오후(2시 30분에서 6시 사이) 기차로 상경하면서 자신 있게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하고 25일 밤에는 26일 중으로 38도 5부까지 진출하겠다고 호언장담한 사람이 그 중간(오후 6시)에 육본에 들려서는 서울 방어가 어렵게 되었으니 한강에서 반격해야 된다고 주장했다면 이 또한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는 배치되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형근의 주장이 허구인 것의 세 번째 근거는 6월 25일 오후 6시의 전황이 한강방어론을 거론할 단계가 아직은 아니라는데 있다. 한강 방어는 최소한 축석령과 의정부가 함락되어 더 이상 서울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즉 26일이 되어야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전쟁 전 수립된 방어계획에 의해 후방에서 전방을 지원하기 위해 전쟁 첫날 육본에 온 후방 예비사단장이 전방 상황도 모르면서 난데없이 서울 방어는 불가능하니 한강에서 반격해야 한다고 실제로 주장했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6월 25일 오후 6시의 상황으로는 아직 서울을 포기한다든가 한강에서 방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사리에 맞지 않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범석 장군이나 김홍일 장군 그리고 국군의 그 어느 누구도 전쟁 첫날 오후 6시에  서울 방어가 어려우니 한강에서 방어해야한다는 그런 천재적(?)인 구상을 한 사람이 없다. 이형근 장군도 국군에 천재는 없다고 했고 그 자신도 천재가 아니다. 나중에 결과를 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작문인 것이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군사편찬연구소의 최용호 중령도 <6.25 전쟁의 실패사례와 교훈>에서 “전후 사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25일 오후 후방지역에서 이동해온 지휘관이 역습이 시작되기도 전에 ‘병력의 축차투입을 지양하고 한강선에서 질서 있는 반격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건의하기에는 다소 앞서 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최 중령님이 공직에 계신 분이라 완만하게 표현하셨지만 전쟁 전부터 수립되어 있던 방어계획에 의해 전선 투입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예비사단장이 전쟁 첫날의 전황과는 상관없이 자기 부대부터는  한강에서 방어하겠다는 억지 주장으로 역시 전쟁 첫날의 이야기로는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형근 회고록은 순진하게 읽는 독자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책이다. 앞뒤의 객관적 사실들과 3자의 증언들을 알아보고 당시의 정황을 파악하여 그의 작문을 읽는다면 어이없게 속아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덧글

  • 2012/09/14 18:45 # 삭제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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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성천 2012/09/15 10:55 #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2012/09/16 17:57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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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6 20:2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9/17 14:48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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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7 18:07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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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16 17:10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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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20 16:55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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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20 17:31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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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20 17:43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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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은성 2012/09/20 19:17 # 삭제 답글

    군번 문제로 고생하고도 떡하니 제목으로 삼은 저 위용...
  • 금성천 2012/09/21 15:21 #

    어차피 성적순도 아닌 것, 선배들에게 양보했어도 되는데.....

    1번 이형근, 2번 채병덕, 3번 유재흥, 4선 장석륜, 5번 정일권

    23번 백인엽, 54번 백선엽, 55번 김백일, 56번 이한림

    백씨 형제분은 동생이 형님보다 훨씬 앞 번호군요.
  • Be폭력주의자 2012/10/20 17:37 # 삭제

    당시 동기간에는 성적순으로 군번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적어도 군영1기 중에는 아마 영어실력이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 2012/09/21 18:17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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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21 18:3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2/09/21 18:42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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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6/08 12:46 # 삭제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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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1 15:51 # 삭제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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