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 서남측(수도사단)지구 전투의 전훈 한국전쟁

 

금성 서남측지구 전투의 전훈


(1) 예비대의 활용에 대하여


본 전투에서 가장 크게 지적되어야 할 것의 하나가 예비대의 활용 문제라고 본다.


무릇 예비대란 지휘관 장중(掌中)의 보도(寶刀)와 같은 것이라 이것을 사용함에는 신속하고 결단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결정적 시기를 포착하여 결정적인 방향을 택함으로써 발검일섬(拔劍日閃)이면 필살하고야마는 신통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는 이와 같이 되지 못하였으니 여기에는 지휘관의 결단성과 지휘의 획일성에 대한 반복의 여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첫째, 사단 예비인 기갑연대 제2대대의 부원(赴援)을 13일 23:30에 명령한 바 자정이 지난 뒤에야 집결지를 출발하게 됨으로써 03:30가 지나서야 제1연대의 CP에 당도한 것이다. 그리고 동연대의 제1대대는 14일 04:00까지도 실제로 예비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제2대대는 집결지에서 사전에 117번A도로까지 추진하여 실제의 기동시간을 단축시켰어야 했으며 제1대대도 보다 일찍 이것이 활용되었어야 하였을 것이다. 예비대의 집중적인 운영을 기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둘째, 역습 방안의 채택에 대한 조치에 있어서 결단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사단장의 직할사용이라면 명백한 지휘가 필요하고 어떤 제1선 연대장의 지휘를 받게 된다면 일임하여 그 자유재량에 맡겨야 할 것인데 직할을 전제로 하면서 우선 예비대를 출동시킨 다음에 다시 부사단장을 현지에 급파하여 ‘역습방안을 조정’케 했다는 것은 양자택일에 준순성(浚巡性우물쭈물함)을 보였다는 탄(嘆)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한 명확한 결심을 보이던가, 아니면 동예비대를 주전부대에 배속 조치하여 제1연대장의 지휘책임 아래 그 임무를 수행케 했어야 할 것이다.


셋째, 지원부대장과 피지원부대장의 의견이 반드시 일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되, 어느 쪽이든 효과적인 쪽으로 신속히 합심하는 것이 난국타개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역습 방안을 앞에 놓고 첨전고후(瞻前顧後)만을 하다가 귀중한 시간을 허비케 되어 제1, 기갑연대장의 이견 가운데 어느 쪽도 실행하여 보지 못한 채로 파국을 자초하는 결과만 빚고 말았다.


이 경우 지원부대는 피지원부대의 요청에 부응함이 마땅하다고 할 것인데 기갑연대장이 자기 복안에 대한 관철만을 주장한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보이지만 이미 고인이 된 분인 탓으로 상론치 않기로 한다.


다만 당초에 제1연대장의 투입방향을 따랐다면 기갑 제2대대가 월봉리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시간, 적어도 30분은 절약되었을 것이며 그 시간의 여유만 있었더라도 제1연대 CP의 그 같은 혼란이나 동 대대의 와해는 피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2) 연대 지휘소의 피습에 대하여


또 이 전투는 적의 공세 그 자체보다도 이천동에 위치하였던 제1연대 지휘소가 피습됨으로써 결정적인 파탄(破綻)이 야기된 것으로 보인다.


지휘소는 신경계통의 중추부와 같은 것이라 전투간에는 이것이 온존되어야 할 것인데 여기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 전쟁을 통하여 적, 특히 중공군은 공세가 있을 때마다 아군의 지휘소 습격을 관용(慣用)의 전법으로 쓰고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예컨대 1951년의 ‘5월 공세’ 당시 미10군단의 우익인 제7사단에서도 너무나 흡사한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즉 그해 5월 16일 저녁, 음양리 부근의 소양강변에 제5, 제8 양 연대로써 주저항선을 점령하고 있던 동 사단의 정면에 중공군이 공세를 취하였는데 자정이 지나기 전에 우일선인 제5연대의 CP(소치리)가 피습됨으로써 좌우일선의 전열이 일시에 와해되고 예비인 제3연대마저 손을 써보지 못한 채3일만에 하진부 선까지 철퇴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당시 동 사단은 그 우익인 제3군단의 좌측배를 폭로케 되어 동 군단의 퇴로를 잃게 한 탓으로 이른 바 ‘현리 포위’를 낳게 하였다는 지탄(指彈)을 불면(不免)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나중에 동 사단을 부원하여 그 전선을 수습한 부대가 또한 미 제3사단의 선견대인 제15연대였다는 점(금성 전투에서 수도사단 남쪽을 막아준 것도 미3사단 15연대)에서 혹자는 우연의 일치였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적은 같은 조건하에서 동일한 수법을 반복하였을 따름이며 이제 사단은 또 제7사단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적의 공세에 있어서 전선의 돌파보다도 후방의 교란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당시에 제1연대는 부원차 내착한 예비대를 지척에 두고도 서로 이합(離合)의 묘를 이루지 못한 가운데 각개 분산되고 말았다는 것은 종적인 지휘망도 그렇거니와 횡적인 협조선에도 허점이 있었다는 단적인 실례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결단코 연대CP병력과 동 대대는 협력하여 일전을 도모함으로써 그곳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때까지 전선에서 고전혈투중인 일선대대는 어디에 의지하여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

<한국전쟁사 9권 대진 말기> p60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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