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사단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의 금성전투 회고 한국전쟁


 

1953년 5월 5일자로 수도사단 부사단장에 취임했다. 나의 또래들과 비교할 때 파격적인 인사였으며 가까운 장래에 장군으로의 진급을 암시하는 예비단계인 것이다.


사단장 C준장은 실전경험이 적고 성격이 외골수여서 매사가 원만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7월 13일 적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습격을 당한 것이다. 이 전투가 승승장구하던 무운을 여지없이 꺾어놓고 내 운명을 뒤집어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나는 전선으로 나갔다. 당연히 사단장이 나가야할 전선으로 말이다.


주방어선인 연대지휘소에 도착하니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예비대의 운영만 잘 했어도 전황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지휘관의 결정이 변경되었다는 것과 예비연대장의 명령 불이행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분초를 다투는 극한 상황에서 금쪽같은 연대는 총 한발 쏘아보지도 못하고 걷잡을 수 없이 분산되어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전선은 여지없이 적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연대지휘소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던 나는 벙커 밖에서 적의 수류탄이 무수히 터지면서야 부득이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적의 중앙에 포위된 상태였다.


약 2킬로미터쯤 후퇴했을까. 낮에 행동에 옮길 것인가, 풀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 다시 움직일 것인가 고민하며 주위를 살펴보니 소위 한명과 하사관 두 명이 옆에 있었다.


동녘으로는 어김없이 1953년 7울 14일의 아침 해가 돋아 오르고 있었다. 강물을 건넜으니 8인치 포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돌아보니 높은 언덕 너머로 8인치 거포의 끝부분이 쫑긋거리며 보였다. 그러나 아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 산의 숲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켜 산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운명의 신은 나를 냉정하게 내동댕이쳐 버렸다. 돌연 등 뒤에서 따발총 소리가 들리며 나의 발 앞으로 총탄이 지나가는 광경이 마치 서부영화에서나 보는 그런 장면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중공군 병졸들 약 20명이 우리 일행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좁혀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8인치 포대로 들어갔다. 포들은 조준상태로 포탄이 장전된 채 방치되어 있었고 거대한 견인차도 시동이 걸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천막 안에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모포와 피복류, 소화기총 그리고 카메라도 식탁 위의 음식도 그대로 놓여있었다. 기습을 당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자체경비도 하지 않은 채 거액의 군장비를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것이 미국인의 낙천주의라는 것인가? 과연 우리가 그들을 믿고 의지해도 되는 것인가?  그 순간 나는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모든 장비가 그대로 있는 정황으로 보아 적의 습격은 거의 없었다고 판단되었다. 부상자나 전사자가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앞에 있던 보병부대가 무너지니 그대로 두고 도망을 간 것이다.


적병 3,4명의 감시를 받으며 나는 북쪽 길을 따라갔다. 다리를 건널 때 포차 옆에서 국군 장교 한 사람이 두 눈이 빠진 채 단말마의 고통에 포차 모서리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죽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한참을 가니 국군 105밀리 포진지가 나타났다. 이곳 역시 좀 전에 지나쳐 온 8인치 포진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어제 밤 이곳에서 우왕좌왕하던 연대의 흔적도 남아있었다. 사단 예비대였던 Y대령이 지휘하던 연대였는데 장갑차와 트럭 등이 타이어가 터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병기들을 송두리째 적에게 넘겨주어야 했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걸었다. 눈썹이 진하고 키가 작은 국군 중령 한 사람이 길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알아보기라도 한 듯 자신은 이곳 105밀리 포대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아군의 주진지선을 지날 때까지 길가에는 셀 수 없으리만큼 많은 트럭과 지프차, 병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탱크도 두 대나 있었고 박격포에 통신기재 등 처참할 정도였다.


.............


나는 내일이면 남쪽으로 돌아간다. 대한민국에서는 나를 어떻게 맞이할까? 일본식으로 아니면 미국식으로 대할 것인가?


나를 보살펴 주시던 상사들의 얼굴도 떠오르고 무능하기 짝이 없던 사단장 C와 기회주의자였던 예비연대장 Y도 생각난다.

<내 심장의 파편>에서 요약  임익순(당시 수도사단 부사단장) p209-210, 252



임익순 대령 회고록을 읽기 전에 이 금성 전투에서 지휘관들의 역습 방향의 의견 대립에 관한  설명이 있었으면 하고 기대했으나 그리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다.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은 사단장에 대해서는 '실전 경험이 적은' '외골수' '무능'으로, 정면 역습을 피하고 측면역습을 주장한 기갑연대장에 대해서는 '명령 불이행'과 '기회주의자'로 비난하고 있다.


덧글

  • 발꼬락 2013/09/23 10:45 # 삭제 답글

    전사한 육근수 대령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보기 좋지는 않군요.
    역습 시기를 놓쳤다면 현장지휘관에 위임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도중에 만난 105mm 포대 지휘관이라는 중령은 전사한 10포병대대장이 아닌지...
  • 금성천 2013/09/23 15:53 #

    그냥 결과적으로 보면 정면역습이나 측면역습을 다툴 것이 아니라 이천동의 1연대 지휘소 인근에서 기갑연대가 매복을 하고 대비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임익순 대령이 포로로 끌려가던 도중에 만난 포병 중령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제10포병대대장 김천근 중령일 것 같습니다.
  • 발꼬락 2013/09/23 22:36 # 삭제 답글

    기갑연대 예비대가 이천동 도착한 시간이 중공군이 연대지휘소 습격한 시간보다 늦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지휘소 인근 매복은 오히려 역매복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보급에 신경쓰지 않고 진격하는 중공군 특성 상 측면 역습을 성공했다고 해도 현리때처럼 아군 후방이 먼저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답이 안나올거 같습니다. 방어선이 뚫리고 포병진지, CP와 후방 지원시설이 공격받으면....
    당시 2군단 포병단 및 미군지원포병대의 역활에도 의문이 있습니다. 아무리 26연대 방향으로 지향이 되었다고 해도 아군 포병전력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얼마전 한국전쟁 전사자 명단을 살펴보는데 대대장급(중령 이상) 전사자가 꽤 많던데 임대령 수기대로라면 제10포병대대장 처럼 포로로 끌려가 전사처리된 경우도 허다 할 것 같습니다.

    어쩌다 역전의 수도사단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지... 안동전투 이후 최대의 패배인것 같습니다.
  • 금성천 2013/09/24 15:56 #

    기갑연대의 투입시기가 조금 더 빨랐거나 월봉리 쪽으로 빠졌다가 역행군하지만 않았더라도 저렇게 철저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기갑연대장의 복안에 따른 측면역습도 무리인 것 같고요.

    105밀리 포를 가진 제10포병대대, 제60포병대대, 제61포병대대, 155밀리 포를 가진 제92포병대대에 미 제555, 제674포병대대의 105밀리 포와 미 제937(-) 및 제955포병대대의 155밀리 포 그리고 제424포병대대의 8인치 포1개 포대와 좌인접 9사단의 제30포병대대와 제89포병대대의 155밀리 포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엉뚱한 곳에 포탄을 소모한 것 같습니다.

    10포병대대 6476발, 60포병대대 6205발, 61포병대대7300발, 92포병대대4160발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13일 자정 전에 거의 다 썼다는 기록이 있군요.

  • 발꼬락 2013/09/24 18:10 # 삭제 답글

    착오가 있었네요. 수도사단이 미 9군단 소속인데 국군 2군단 소속으로 착각했습니다.
    날씨 문제로 항공전력은 지원불가. 그래도 9군단 포병의 절반 이상(?)을 배정받고도 포병전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한 문제도 분명해 보입니다.
    하필 휴전 전에 발생한 전역이라 실지를 회복하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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