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지사 이종혁 김석원 장군 이야기

이종혁은 충청도 태생으로 이충무공의 피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십대에 대한제국의 군관학교에 들어갔다가 일본 육군유년학교로 넘어간 몇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몇 사람 가운데는 이응준, 김석원등이 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뒤 일군 소위로 임관되어 인천에 귀국의 첫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에 색채어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천의 어느 실업가의 딸과 짧은 결혼생활을 가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녀(一女)를 이룬 뒤 파탄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는 부인과 갈라지면서 아이를 자기한테로 데려오려고 소송까지 벌였던 모양이나 부인 편에서 놓지 않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한 가정의 파탄과 어린 딸과의 생이별은 그러지 않아도 혈혈단신에 가까운 신세의 그를 더욱 고독하게 했던가 보다.


그는 소위로서 일본의 시베리아 출정에 끼어 갔다. 연해주의 어떤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로단(露探 러시아 스파이)의 혐의를 받고 끌려온 민병(民兵)참가의 한 조선인을 취조하는데 입회하게 되었다.


이렇다 할 저항을 느끼지 않고 순탄하게 일본 사관으로서의 교육을 받아온 이종혁에게는 로단으로 잡혀온 같은 조선인의 신세가 여간 기이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돼서 이런 북새판에 끼어들었느냐?" 이렇게 묻자 그 로단은 말끄러미 일군 차림의 이종혁을 건너보다가 물었다. "당신 조선 사람이구려. 당신은 어떻게 돼서 그런 왜놈 군관의 복장을 하고 이런 데까지 와서 어정거리고 있는 거요?"하고 뚫어질듯이 이종혁의 두 눈을 쏘아보았다. 이종혁이 아차 싶다고 생각하고 버럭 고함을 지르려 했을 때 그 조선인 로단은 이쪽에 루바슈카의 등을 보인 채 벌써 형장을 향해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오래도록 이종혁의 안막에서는 그 조선인 로단의 뒷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한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신상에 회의를 갖게 하고 고민 끝에 일군을 떠나게 한 것은 3.1독립운동이었다. 그는 차차 한반도 전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는 "소요"에서 숱한 동족이 죽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개월 후 조선군 사령부가 있는 경성에 내려선 그는 예전과는 달리 어깨를 축 늘이고 눈길을 땅에 떨군 채 동족들이 오가는 거리를 마치 상가집 개인 양 맥없이 걸어가야 했다.


다시 현해탄을 건너 원대로 돌아가자 그는 까닭모를 신병을 내세워 예비역에 편입하고야 말았다. 군복을 벗고 경성으로 돌아온 그는 커다란 고리짝 하나를 외우 유봉영에게 맡겼는데 그 속에는 일본군의 병서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얼마 후 만주로 떠나면서 유봉영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이 병서를 자기에게 보내줄 수 없느냐고 했다. 유봉영은 그가 만주로 떠난 뒤 친척의 이삿짐에 담아 봉천으로 그 병서를 보냈다.


이종혁은 마덕창이란 이름으로 당시 유동열이 주재한 참의부 군사위원회에 나타나게 된다. 그는 거기서 일군 병서의 번역과 만주에 널려있는 한교의 군사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이 그의 삶의 전부가 되었다.


북간도와 서간도를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문득 그의 뇌리에 되살고 짜릿한 인간적 감상에 사로잡힌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혼한 아내에게 남겨둔 여아의 환상이었다고 할까? 그러한 가운데 그는 가끔 그가 시베리아 출정 때 만난 조선인 로단을 생각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왜놈 군복을 벗었소."하고 그는 아득한 만주 벌판의 어딘가에 대고 그 로단을 눈앞에 보듯이 중얼거려 보는 것이었다.


침식을 잊고 군사위원회의 임무에 애를 태우면 태울수록 그는 자신의 힘이 너무나 미약한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만주에 널려있는 학교들을 찾아다니면서 차차 군사훈련 이전에 해결해야할 문제가 가난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일개 무반으로서 자기는 그 가난을 해결하기는커녕 그들의 가난한 호주머니에서 목총 한 자루 값이라도 털어내야 했고 없는 속에 끼어들어 낟알을 축내야 했다.


그는 언젠가 유동열에게 그 고충을 털어놓았다. 유동열은 잠시 속으로 감아드는 품이더니 "어떡하겠소. 우리가 할 일이란 너무나 많고 또 모든 것이 다급하구려. 그러니 한 눈을 감고 우리는 군사위원회에 맡겨진 일에나 열중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소?"하고 타일렀다. 심란하고 외로울 때면 마덕창은 인천에 있는 어린 딸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한 번도 회답을 받지는 못했다.


마덕창이 봉천에서 일본 관헌에게 잡힌 것은 1927년 가을의 일이다. 당시 독립투사들이 잡히는 대개의 경우 조선인 밀정의 밀고에 의했는데 마덕창의 경우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일헌은 마덕창이 육사출신의 어엿한 일군 중위였던 이종혁이었던 것을 알자 충격을 받고 마덕창 체포를 중대시했다.


현역 조선인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도 중형을 가할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의 재판관들은 법률에 규정된 상훈의 특전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덕창은 시베리아 출정으로 말미암아 받은 상훈이 감안되어 오년 징역형을 받고 평양 감옥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그는 오년이란 복역기간이 바로 일군 사관으로 복무한 오년간에 저지른 잘못을 속죄케 하는 하늘의 명령이라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복역태도는 수도하는 성자의 그것과도 같았다. 옥리들은 그의 과거 경력에 비추어 일종의 외경을 느꼈고 죄수들은 함께 갇힌 독립투사에게 하염없는 존경을 보냈다.


그가 다른 죄수들에게 어떻게 해서 이런 감옥에 들어왔냐고 물으면 죄수들은 얼굴을 붉히며 도둑질을 해서 그저 부끄럽다고 모깃소리로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는 만주 벌판의 여기저기서 눈으로 본 또 이 감옥에서 생생히 느끼는 동족의 가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신음에 가까운 심사숙고를 경험하면서 자기가 복역을 끝낸 뒤 할 일이 어쩌면 군사 활동이 아니어야 할는지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다. 좀 더 이 죄수들과 같은 처지의 동족 속에 뛰어드는 일이어야 한다는.......


마덕창의 성자 같은 복역태도를 주목해오던 일본인 교회사(敎誨師)가 이년 가량 지난 어느 날 조용히 자기 방으로 그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의 인격을 찬양하고 나서 "선생께 특사의 은전을 베풀자는 호의적인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면 특사를 받으실 텐데 대범하게 생각하시고 저희들의 호의를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에게 특사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흥분을 자아내게 하는 마력이 갖는다. 마덕창은 먼저 인천에서 자라고 있을 어린 딸을 생각했다. 자기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뉘우치면 뉘우칠수록 자꾸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이제는 여덟 살이 되었을 그러나 아직 자기에게는 두 살의 모습으로밖에 잡혀지지 않는 어린 딸의 모습이었다. 만나보고 싶었다. 와락 그러안고 그 보드랍고 따스한 살결과 체온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생각의 차원을 높였다. 자기가 이 감옥을 나가면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중단된 군사적 임무와 동족의 가난을 극복해야 하는 일이 쌓여있지 않은가.


그로부터 두주일 쯤 되는 어느 날 교회사가 다시 그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이고 호의어린 얼굴로 건너보며 물었다. "오늘은 좋은 말씀을 들려주실 테지요?"


"호의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저는 역시 복역기간을 다 마쳐야 하겠습니다." 교회사는 적이 놀란 얼굴로 잠시 멍하니 보더니 "그 말 한마디 하시기가 거북하셔서 그러시는 건가요?" "아니오. 남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사는 안타깝다는 듯이 "아니 그렇게 생각하실 게 아니라....... 그러면 여기서 저 하나만 속이면 되는 게 아니오? 잘못 했다는 그 한마디만." "아니오. 그것도 그렇지만 저 자신을 속일 수 없는 거요"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 교회사는 아무 말 않고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마덕창은 얼핏 자기 손을 내밀어 교회사의 손을 쥐었다 놓고는 얼른 몸을 돌려 교회사의 방을 나오고 말았다.


복역 만기를 일 년 앞두고 마덕창은 늑막염에 걸렸다. 옥고에 병고가 겹친 그는 몹시 고통을 느끼고 괴로워했으나 형무소 당국은 그의 병고에 아주 냉담했다. 의사의 진찰은 받을 수 있었으나 제대로 투약하지 않아 그의 몸은 나날이 쇠약해 갔다. 병동에 옮겨졌어도 가슴에 괸 물조차 그들은 빼내주려 하지 않았다. 병고로 흩어지는 그의 마음을 가누어주는 것은 동료 죄수들의 우정이었다. 만기로 출옥하는 날 그는 들것에 들려 감옥 정문을 나와야 했다.


그가 서울 소격동에 있는 유봉영의 비좁은 집에서 전동(典洞)여관으로 옮긴 뒤 들어야 할 것은 그가 인천에 사는 이혼한 아내에게 맡겨두었던 딸이 이미 일 년 전에 죽었다는 비보였다.  그렇게 강인한 그도 유봉영의 손을 붙들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의 병은 골수에 들어 치료를 해도 좀처럼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유봉영은 어느 날 그에게 신문에 내어 동지들에게 지금의 형편을 알리자고 했다. 그는 유봉영을 따라 조선일보사를 찾아 사진도 찍고 기사화하려는 기자의 질문에 찬찬히 대답해 주었다.


거의 치료비가 떨어질 무렵 평북 선천의 어느 특지가가 나타나 그를 선천으로 데리고 갔다. 어떤 특지가라 하여 여기서 그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그가 비루한 처세가였다는데 있다. 어쩌면 당시의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특지가는 일본 관헌에게도 한눈을 팔고 독립투사에게도 한 눈을 감지 않은 그렇게 두 다리를 걸고 사는 것을 처세술로 구사하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특지가가 일헌에게 한눈을 판 것은 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한 일이고 그의 진실한 향심은 독립투사에게 있었다고 생각할 때 그의 호의는 높이 사주어야 할 지 모른다.


그는 선천으로 옮긴 석 달 뒤 거기서 죽었다. 사망 통지의 전보를 받고 선천으로 달려간 유봉영은 야위고 야윈 강파른 이종혁의 죽은 얼굴에 깃든 끝없는 정밀(靜謐)을 보고 엎드려 절하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유계(幽界저승)로 넘어가는 일순의 각성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혼한 아내를 생각했을까. 어려서 죽은 가엾은 딸을 생각했을까.

미처 철들지 못해 일시나마 일군에 몸을 담았던 젊었던 시절을 회한으로 돌아보았을까.

시베리아에서 자기를 타박한 그 로단을 생각했을까. 만주 벌판을 동분서주하며 사귄 한교들의 여전할 가난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평양 감옥에서의 교회사와의 대결을 뇌리에 그렸을까. 어린애 같은 부끄러움으로 자기를 우러러 보던 평양 감옥의 파렴치범들을 그리워했을까.


절망적인 조국 광복을 슬퍼했을까.


그를 도와준 숱한 친구들 유봉영과 김석원 등의 우정을 고맙게 생각했을까.


좌절된 그의 일생을 뉘우치고 눈물지었을까.


아니 그는 무한한 자족의 감정에 젖어 운명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자기가 이승에 태어난다면 일군 사관의 시절을 빼놓고는- 아니 그것마저 어쩔 수 없이 포함시켜 자기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뉘라서 이종혁-마덕창의 생애를 실패의 생애였다고 하리. 그는 일제 말기에 변절한 원래의 독립투사들과는 완전히 거꾸로 된 길을 걸었다. 부단히 뉘우치고 성실하게 선택하며 그리고 한 발자국씩 진리에 다가서면서.......


고독한 그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아 이제까지 건국 포상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는데 금년 들어 어느 옛 부하가 그것을 밝혀 일건 서류를 제출했다고 하니 형식적이고 뒤늦게나마 그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게 될는지 모르겠다.


그의 무덤은 휴전선 이북의 평북 선천 거리에서 약 이십 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 때 뜻있는 사람들이 자그마한 묘비를 세워 통일만 되면 찾아보기 그리 힘들지 않으리라고 한다.      

선우휘 선생의 1966년 단편 <마덕창 대인> 요약




유봉영- 독립운동가, 조선일보 기자. 해방 후 조선일보 주필, 부사장

김석원- 일본육사 27기. 독립운동의 길을 간 김광서 지청천의 가족, 이종혁 등을 돌봄. 일본군 대좌. 해방 후 1, 수도, 3사단장

유동열- 일본육사 15기.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군무총장. 해방 후 통위부(국방부전신)장. 1950년 납북 


덧글

  • 재팔 2015/03/26 16:44 # 답글

    그러고보니 김장군 회고록에서 이종혁 부분이 있었는데, 회고록을 고향집에 두고와서 못 올리는 게 안타깝네요 ^^
  • 금성천 2015/03/26 16:55 #

    언제 한번 올려 주세요. 아니면 제가 먼저 올립니다. ^^
  • 재팔 2015/03/26 18:14 #

    왠지 금성천님한테 선수를 빼앗길 것 같은 느낌은 뭐죠? ㅋㅋㅋㅋㅋ
  • 금성천 2015/03/26 18:18 #

    저도 어째 제가 먼저 올릴 것 같은데요. 이제는 그만 쓰려고 하는데도... 부담 갖지 말고 누가 먼저 올리든 천천히 합시다.^&^
  • 갈천 2015/09/30 15:22 # 답글

    이종혁 관련 김석원장군의 회고록은 언제 올리십니까? 올려달라. 올려달라. 시위해야쥐.
  • 2015/10/06 15:0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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