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과 이종찬 김석원 장군 이야기

우리는 배밭에서 나와 뒷산 기슭에 정렬하여 사단장님들의 훈시를 들었다. 해질녘이었다. 떠나는 김석원 사단장이 신임 이종찬 사단장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김석원 장군은 우리 중학생 시절 일본의 일선 대대장으로 용명을 떨쳐 신문에도 크게 난 맹장이었다. 카이젤 수염과 쩌렁쩌렁한 음성에 과연 힘과 위엄이 넘쳐 있었다. 우리들도 덩달아 몸에 힘이 솟는 듯 했다.

 

헌데 훈시의 일부가 좀 뜻밖이었다. "적군 백 명 가운데 우리 피난민 다섯 명이 섞여 있을 경우 그 적군을 사격해서는 안 된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웬만한 희생은 감수하라고 해야 어울릴 터인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 카이젤 수염 언저리에 새삼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후에 들으니 김 장군은 적의 포화를 무릅쓰고 돌격하는 백병전을 주장하여 미 고문단과 다툰 끝에 밀려났다고 했다. 그러한 이로서 민간인의 희생을 무릅쓰지 말라고 강조한 그날 저녁의 훈시는 장군의 평소의 이미지와는 다른 따뜻한 일면을 엿보게 한 장면으로서 내 기억에 생생하다.

 

신임사단장(이종찬 대령)은 깡마른 얼굴에 청동상 같이 꼿꼿했다. 어스름이 내리는 너머로 번득이는 눈총기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비범한 야전 지휘관의 풍모였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들이 있구나 하고 나는 그동안 군대를 함부로 얕잡아 보았던 경망이 죄스러웠다.

23연대 병사였던 최정화 시인의 <그 여름 겨울, 도서출판 범한, 2000>에서



덧글

  • 재팔 2015/04/10 16:10 # 답글

    문제는 저런 분들이 성공은 못하시고 정치군인들이 많이 출세하니...ㅠㅠ
    예전에 안용현씨가 자기 저서에서 김장군 이야기를 하면서, "그분은 자기 자서전에 한을 붙일 정도로 군대에 대해 뭔가 할 말씀이 있던 것 같았다"라고 적은 게 기억나네요.
    그러보고니 순수 일본 육사 계열은-물론 중앙관직에서 놀은 육군대학 출신자가 없긴 했지만- 정치군인(채병덕이 살짝 담글뻔 했죠?)이 없고, 괴뢰군 만주군 출신들에서 정치군인이나 전역 후 정치가들이 나온 것은 재밌는 것 같습니다. ㅋㅋ
  • 금성천 2015/04/10 16:28 #

    일본 육사 출신들이 비교적 순수한 편이죠. 엘리트 의식이 강하여 남에게 아쉬운 소리도 못하고 원칙대로만 세상 살려하니 음성적 수완과 응집력 강한 만주군 출신들에게 오히려 밀리는 감이 있습니다.
  • 조은성 2015/04/10 16:20 # 삭제 답글

    일본군 경력과 함께 현대전 수행능력이 부족하다며 까이던 두 사람이지만 군인으로서의 소신을 지키면서 권력의 압력에도 당당히 맞서던 분들이죠.
    요즘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일들로 이름을 알리는 자들을 보면서 왠지 그 빈자리가 느껴지네요...
  • 금성천 2015/04/10 16:42 #

    예나 지금이나 깨끗한 사람들은 처세에 어려움이 많죠.
    해군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근래 들어 해군 장교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인지 궁금해집니다. 아주 화가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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