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고지 전투 - 한미 해병대의 공격 (9월 22, 23일) 한국전쟁

9월 22일 07:00 미 제 5해병연대의 공격은 개시되었다. 전날과 같이 좌측방에 위치하는 제 3대대의 목표는 안산 296고지, 우측방 제 1대대의 목표는 와우산(남쪽 105고지, 홍익대 뒷산), 그리고 중앙에 위치하는 한국 해병 제1대대의 목표는 의령터널고지라 불러 무방할 북쪽 105고지였다. 전날 영등포 공격에서 미 제 1해병연대를 지원하던 미 해병 항공기들도 이날은 주로 제 5연대 지원에 나섰다.


이날 공격에서 좌전방의 제 3대대가 안산 296고지를 신속히 확보할 수 있다면 중앙과 우전방의 진출은 좀 더 용이하리라는 것이 연대장 머리 중령의 생각이었다. 미 해병전투기들이 안산 일대를 강타하는 동안 제 3대대 공격의 선두에 선 H중대는 대단치 않은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09:45에 안산 주봉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된 이 연대의 공격상황은 머리 중령의 기대처럼 순탄하지는 못했다.


한국 해병 제 1대대는 목표인 북쪽 105고지를 공격하기에 앞서 대대 정면을 가로막고 있는 연희능선 즉 안산에서 56고지로 이어지는 능선과 이 능선 너머에 있는 88고지(세브란스병원의 북쪽, 연세대 노천극장의 동쪽 언덕)를 먼저 탈취해야 했다. 이 대대의 공격개시선이 될 104고지 능선과 그 전방의 연희능선은 불과 1킬로미터의 간격을 두고 평행하게 놓여 있으며 이 양 능선 사이의 계곡 저지대에 가로놓인 300-500미터 폭의 논들(현재의 연희로 주변)이 실질적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생각되었다.


이날 새벽에 있었던 적의 역습을 물리친 뒤 104고지의 북쪽 사면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제 1 및 제 2중대는 능선을 넘어서자 제 1중대가 궁동 좌측(연희 2동)으로 제 2중대가 우측(연희 1동)으로 전개하였다. 마침내 이들 중대가 개활지에 들어서자 적의 기습적인 사격은 개시되었다. 전방 능선 상에서 적의 중화기 및 자동화기들이 불을 뿜었고 야포와 박격포탄도 날아왔다. 일선 중대의 공격이 돈좌(頓挫)되자 이윽고 우군 포병 및 항공기가 지원되었다.


우군의 지원사격을 받은 뒤에도 상황이 타개되지 않자 우일선 대대로부터 배속전환된 미 해병 전차소대와 함께 제 3중대가 철로를 따라 전방으로 진출하였다. 104고지 바로 서쪽에서 철로는 연희터널(서대문 우체국 밑)을 통해 신촌역으로 이어지는 경의선과 서강역으로 이어지는 용산선으로 갈라진다. 우측방 미 1대대와의 경계는 용산선이었다. 높은 뚝 위에 있는 경의선 좌측으로 이 철로와 평행하여 좀 낮게 뻗은 길을 따라 5대의 전차와 이 전차들을 엄호하는 제 3소대가 진출하였다. 잔여 소대는 104고지의 남쪽 기슭을 따라 전진하였다.


步戰부대는 전방 연희능선상의 56고지와 연희터널고지로부터 집중되는 적의 자동화기와 대전차포 사격을 피할 길이 없었다. 제 3중대의 다른 소대들 역시 개활지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결국에는 3개 중대 모두 적의 사격에 묶이고 말았다. 전차도 더 전진하지 못하였다. 제 1 및 제 2중대의 경우에는 전방에서 날아오는 적의 사격도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안산 山系에서 날아오는 적의 측방사격이 더 치명적인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제 1대대는 104고지로 다시 물러나 부대를 수습하였다. 전사자가 11명, 부상자가 45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후일의 포로 신문에서는 북괴군 제 25여단도 이날 무려 40%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좌측 대대의 목표인 안산 296고지가 확보되면 호전되리라 믿었던 상황이 막상 기대에서 어긋나자 미 제5 해병연대에서는 그 원인이 한국 해병들의 경험부족과 미숙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 좌측방의 제 3대대는 목표상에 한 발판을 겨우 마련한 것에 불과하였다. 안산의 주봉과 거의 같은 높이의 남쪽으로 뻗은 복잡한 능선들 위에 적 부대는 포진하고 있었다. 이 적들에 의한 역습과 각종 화기 및 박격포의 사격을 받아 미 제 3대대도 이날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암석으로 형성되어 진지를 구축할 수 없는 안산의 정상부를 일부러 쉽게 내주고 타격을 가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와우산이 목표인 미 제 5해병연대 제 1대대는 이날 용산선을 따라 전차와 B중대를 앞세워 한국 해병대대와 협조된 공격을 펼치려 했으나 전차소대가 한국 해병대로 배속전환되자 기동계획을 바꾸었다. 이날 10:30 쯤에야 실질적 공격에 나선 A중대는 와우산 하록까지 접근했으나 전사한 제 1소대장과 중상을 입은 제 3소대장 등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격이 돈좌되었다. 오후에 우측방으로 우회기동한 C중대 역시 한동안 고전했으나 항공 및 포병 지원이 계속되는 동안 부대를 수습하여 뒤따라 가세한 A중대와 함께 17:35 와우산 정상을 탈취하였다. 이 대대는 전사 12명, 부상 31명 외에 극심했던 적의 포격으로 후방지역에서 입은 손실이 전사 6명, 부상33명이나 되었다.


9월 23일 07:00 해병 제 1대대의 공격은 다시 시작되었다. 정면공격을 감행하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다만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3개 중대를 병진시키기로 하였다. 기필코 목표를 점령하려는 해병들의 비장한 각오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적의 사격은 전날보다 더욱 치열하였다. 밤사이 적들은 부서진 진지를 보수하고 손실병력을 보충하여 2000에 달하는 병력이 한국 해병대대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걸음을 전진할 때마다 희생도 늘어갔다. 좌전방의 제 1중대에서는 안산 쪽으로 우회진출하던 제 1소대장 신양수 소위가 부상하고 소대에 약간의 희생자가 발생하자 이들의 엄호 하에 잔여중대를 이끌고 개활지를 횡단하려던 중대장 정만진 중위의 계획은 쉽사리 실천될 수 없었다. 김광식 대위가 지휘하는 중앙의 제2중대에서는 소대들이 은폐물을 찾아 부지불식간에 양 측방으로 쏠려버려 이 소대들을 다시 규합하고 공격방향을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가장 심한 적의 사격을 받은 것은 우전방의 제 3중대였다. 항공 및 포병사격에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는 연희터널과 56고지가 3중대 정면에 있었다. 이 중대 우전방에서 전진하던 제 1소대장 김한수 중위는 개천(현재의 연희로 서쪽 50미터에서 연희로와 나란히 지나는 이면도로. 원래 약간 굴곡진 개천이었으나 직선화하고 복개하여 일부 노상주차장으로 쓰이며 근래엔 대형음식점들이 주변에 많이 생겼다)을 건너서지도 못하고 왼쪽 다리의 부상으로 후송되고 말았다.


제 1대대장 고길훈 소령은 각 중대의 전진이 부진하고 병력을 뒤로 뺄 수도 없자 무릎을 치면서 울었다고 한다. 인사부관 이홍빈 소위가 중대의 공격을 독촉하기 위해 전방으로 나갔으나 적의 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사령부의 헌병, 정보대 등 후방요원들 중에서 급히 차출된 병력 62명을 이날 오전 중 제 1대대에 증원하였다.


23일 제 3중대 좌전방의 제 3소대장 이도조 일조(一曺)가 중대장 이봉출 대위의 돌격명령을 받고 개천을 뛰어 넘은 것은 한낮이 다 되어서였다. 거의 같은 무렵에 다른 중대에서도 일부 소대들이 개천을 건너섰다. 어쩌면 해병들로서는 전진로상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이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치열해지는 적의 사격에 부딪쳐 중대마다 주력의 대부분은 개천을 건너서지 못했다. 그동안의 전투를 통해 어느 중대든 소대장 한 두 명의 손실은 다 있었기 때문에 각 중대 모두 전술적 소대 운영은 사실상 어려웠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이날은 대대와 각 중대가 모두 전혀 예비대를 운용하지 못한데서 결정적인 시기에 이 대대의 공격력은 지속될 수가 없었고 각종 지원화기는 물론 자체 공용화기 또한 부대 기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어쩌면 승기로 이어질 수 있는 모처럼의 계기를 놓치고 만 것이었다.


한낮이 조금 못되어 미 제 5해병연대장 머리 중령은 예비대로 수색 일대에 위치하고 있던 예하 제 2대대로 하여금 한국해병대대와 교대준비를 하라는 구두 예고명령을 하달하였다. 연대장은 전선 중앙의 불균형 상태를 조속히 타개하고  곧 실시될 미 제 1해병연대의 한강도하를 엄호하려면 공격의 속도를 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날 13:00 제 2대대 지휘소가 104고지 바로 뒤로 이동되었다. 이 대대로서는 안산 쪽으로부터 종격실(縱隔室)을 따라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격방법으로 대대장 로이즈 중령과 연대장 사이에서는 일단 논의 되었으나 이럴 경우 이미 이동 중인 부대를 재전개시켜야 하므로 공격속도가 늦추어지게 마련이었다. 차선의 방법은 정면공격뿐이었다. E중대가 104고지에서 지원사격을 하는 동안 D중대가 56고지를, F중대가 연희터널고지를 공격하기로 했다. 물론 적의 주진지는 훨씬 전방의 큰고개(대현동)와 노고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을 것이라는 논리적으로는 타당한 가정을 전제로 결정된 공격방법이어서 약간의 포병 준비 지원사격을 받고 공격간에는 전차소대의 지원을 받으면 공격은 무난하리라고 미 해병 지휘관들은 내다보았던 것이다.


9월 23일 15:00 전차의 직접지원 하에 F중대가 선도하는 제 2대대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한국 해병대대 전방으로의 초월공격이었다. 선두 전차가 개울에 빠져 전진로가 막히자 뒤따르던 전차들이 철둑 위로 올라서는 동안 F중대는 철둑 사이의 저지대를 통과하면서 많은 손실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차들이 다시 적진을 강타하는 동안 D중대는 소대별로 개활지를 횡단해 나갔다.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연희터널고지에 이른 F중대는 일대의 적들을 동쪽으로 몰아붙이는 한편 계획에 따라 D중대의 진출을 돕기 위해 예비소대인 제 2소대를 56고지 쪽으로 진출시켰다. 제2소대가 56고지와 그 남서쪽 지대의 적들과 치열하게 접전하는 동안 D중대는 56고지의 북쪽 사면을 기어 올라갔다. D중대가 56고지에 급편 방어진지를 마련하는 사이에 날은 어두워졌고 그동안 56고지와 연희터널고지 사이의 작은 봉우리에서 다수의 적과 혼전을 벌이던 F중대의 제 2소대에서는 1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당했다. 살아남은 소대장 앤더슨 소위와 소대원 7명은 부득이 전사상자들을 이끌고 중대와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F중대는 연희터널고지 동쪽에서 야간방어에 들어갔다. D중대와 F중대는 지척에 있으면서도 주변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채로 저마다 포병 사격에 의존하면서 이날 밤을 보냈다.


이날 오후 갑작스런 공격중지명령을 받은 한국 해병 제 1대대의 각 중대들은 미 해병 대대가 초월전진하기까지 전선을 지키고 있다가 다음 명령에 따라 104고지 후방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대대 좌전방의 제 1중대에서는 전방 깊숙이 전진했던 일부 병력이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적진 가운데 고립돼 있다가 다음날 미 해병들이 통과한 뒤에야 중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틀째의 공격에서도 해병 제 1대대는 전사 32명, 전상 68명, 실종 1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보았으며 22일과 23일 양일간의 전투에서 거의 모든 분대장들을 잃었다.


한편 전선 양측방의 제 5해병연대 예하 제1및 제 3대대는 전날(22일) 장악한 각자의 목표를 계속 확보하면서 중앙 대대의 전진을 사격으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날(23일) 새벽 적의 가벼운 역습을 물리친 양 대대는 사실상 주변지역의 적 탐색활동 중 수월찮은 적의 저항을 받았다. 이들이 사격으로 인접부대를 지원한다는 것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덧글

  • 信念의鳥人 2016/06/22 12:59 # 답글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송지효씨가 연희고지를 검색하는 장면에 금성천님 이글루가 뜨더군요 ㅎ 생각난김에 들러봤습니다.
  • 금성천 2016/06/23 11:53 #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군요. 그런 식으로라도 역사를 공부해야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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