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서편 스미스 능선 전투 (9월 24일) 한국전쟁


한국해병 제1대대로부터 물려받은 미 제 5해병연대 제 2대대의 공격목표는 북부 105고지라 불리던 의령터널(이화여대 정문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지점의 철도터널)고지였다. 이 목표 공격에 앞서 안산에서 56고지로 이어지는 능선과 88고지가 장악되어야 하는 것도 물론 한국 해병 제 1대대의 경우와 다를 바 없었다.


9월 24일 대대장 로이즈 중령은 D중대와  F중대가 현 접촉선에서 공격을 재개하면 양 중대 사이로 E중대를 진출 전개시켜 E중대로 하여금 88고지와 북부 105고지 공격에 앞장서도록 할 계획이었다. 이날의 공격개시 시간은 06:30으로 이에 앞서는 20분간씩의 항공 및 포병 준비사격도 계획되었다.


제 2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분명히 날은 새었으나 주위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와 연기로 감싸여 있었다. 이즈음 적들은 우군기의 공중관측으로부터 진지를 은폐하기 위하여 다량의 발연통(發煙筒)을 피워대고 있던 터에 이날따라 안개가 짙게 깔렸기 때문이었다.


56고지로부터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소탕전을 벌이게 될 D중대로서는 56고지 북쪽의 큰말(큰마을, 연희3동)과 이 큰말에서 56고지 동쪽의 작은 계곡으로 뻗은 작은 길(연세대 西門 일대로 추정)을 발견하고서야 주변의 대체적 지형판단이 가능했다. 56고지 동쪽의 소로를 횡단한 D중대 제 3소대는 08:00 전후하여 맞은 편 비탈을 통해 그리 넓지도 높지도 않은 능선에 올라섰다. 視界는 아직도 극히 불량했기 때문에 선두분대가 수류탄 투척 거리에 있는 적의 교통호를 발견하기까지는 적들 역시 미 해병들의 접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식간에 불꽃이 튀면서 적들도 미 해병들도 쓰러져 갔다. 소대장 맥노튼 소위는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후에도 계속 소대를 지휘했다.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능선 우측으로 기동했던 스미스 병장의 제 3분대에서는 위생병을 포함, 8명이 전사하고 부상한 3명만 살아 돌아 왔다.


제 3소대 좌측방으로 진출한 제 2소대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사상자만 계속 늘어날 뿐이었다. 중대장 스미스 중위는 중대본부 요원을 포함, 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방으로 보냈다. 60미리 박격포소대장 그라임즈 소위 이하 반원들도 포탄이 소진되자 소총수로 나섰다. 안개가 걷히면서 적의 위치가 드러나자 비탈 위에 거치한 2정의 기관총이 그런대로 적의 사격과 맞섰으나 상황은 불리하였다. 포병과 81미리 박격포가 지원에 나섰다. 미 해병의 콜세어 비행기가 폭탄과 로케트탄 그리고 네이팜탄 등으로 적진을 사정없이 때렸으나 너무 저공이었기에 두 번째 공격에서는 10대 중 5대가 적의 대공 사격에 피탄되었다.


오전 내내 D중대가 혈전을 벌이는 동안 전날의 손실로 가용병력이 90명 정도에 불과했던 F중대는 또 다른 미 해병전투기 편대의 지원을 받으며 연희터널고지(서대문 우체국 인근) 동쪽의 한 고지에 올라섰다.


56고지로부터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D중대의 공격은 힘겹게 계속되고 있었다. 한걸음씩 전진할 때마다 병력은 줄어만 갔다. 맥노튼 중위의 제 1소대가 9명, 호와드 소위의 제 2소대가 10명, 돗지 소위의 제 3소대가 11명으로 감소되어 더 전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중대장 스미스 중위가 대대에 세 번째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대대장의 응답은 여전히 공격을 계속하라는 명령이었다. 대대장으로서는 다음 목표 공격을 위한 대비 때문에 예비대를 더 아껴두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 D중대와 한 능선 상에서 대치해 있던 적들은 100미터가 조금 넘는 높이를 가진 능선 정상(연희3동 28번지 일대)에 강력한 진지를 가지고 있었다. 한낮이 지날 무렵 D중대장은 돌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스미스 중위는 대대장과 조정하여 돌격요령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1. 돌격부대 33명은 돌격개시선 100미터 정면에서 산개하여 돌격준비를 한다.

2. 돌격지원을 위해 스미스 중위의 무전유도로 콜세어 전폭기가 총격 폭격 네이팜탄 투하를 감행한다.

3. 공중공격의 효과가 있으면 콜세어 전폭기는 보병에게 돌격신호를 하면서 총격과 폭격을 멈추고 위협비행을 계속한다.

4. 돌격부대는 콜세어기의 신호와 동시에 돌격하여 130미터 전방의 적 진지로 쏜살 같이 돌입한다.

5. 기관총부대 11명은 돌격반을 따라간다.


스미스 중대장이 돌격준비를 명령하자 대원들은 돌격이 비참한 결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돌격시마다 지휘관들이 차례로 사상 당하고 대원의 수가 반으로 줄어들었던 경험을 갖고 있었기에 이번 돌격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체념했다고 한다.


맥노튼 중위가 관측을 하고 스미스 중위가 무전으로 콜세어에 연락하여 공중폭격이 시작되었다. 1번기의 폭격은 130미터나 빗나갔다. 2번기는 매우 정확했으나 3번기의 것은 중대 전방 50미터에 떨어지는 오폭이었다. 해병들은 콜세어의 급강하 때마다 콜세어와 자기 자신을 격려하기 위하여 환성을 올렸는데 3번기의 폭격에는 환성이 욕설로 바뀌었다. 4번기가 신호탄을 발사하면서 돌입해 왔다. 총격과 폭격이 없는 위장공격이었으나 대부분의 북한군은 폭격을 할 줄 알고 참호 속으로 엄폐하였고 동시에 스미스 중대장을 선두로 32명의 대원들이 돌격을 개시했다. A자형의 돌격대가 돌격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우측방에서 총성이 울리는 순간 스미스 중위가 쓰러졌다. 즉사였다. 맥노튼 중위가 지휘를 계속했다. 해리슨 상병이 기관단총으로 전면에 맹사를 가하고 바스카레 상병, 라센 중사, 힐 상병이 잇달아 부상당하면서도 돌진해 갔다. 100미터 폭의 돌격대형이 적 사격에 의한 피해로 간격이 생겼으나 중대는 계속 돌진하였다. 마침내 26명의 돌격대원들이 정상의 적진지에 돌입하였다. 일부의 적병들이 남아 있었으나 몇 명은 죽은 시늉을 하고 있었고 수백 명의 적병들은 동쪽 산비탈로 도망치고 있었다.


미 해병대 전사에서는 이 돌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격찬하고 있다. "격전의 승패가 결정되는 '때'라는 것은 정신적인 균형이 깨지는 바로 그 '때'이다. 불타는 의욕을 갖고 있는 용자에게 승리가 있고 우유부단한 쪽에 패배가 있다. 주저 없이 적과 죽음에 직면하게 될 능선으로 뛰어 오르는 소수의 젊은이(통상 10% 이내)들에 의하여 이 중대한 승부의 저울은 기울어지게 된다."


정상을 탈취한 맥노튼 중위는 인원점검을 위하여 계급별로 손을 들게 하였다. 생존자는 모두 30명이었다. 얼마 후 지원부대가 도착하여 D중대원은 56명으로 늘어났으나 이중 26명이 부상을 입고 있었다. 24일 아침 D중대가 공격을 개시했을 때의 총인원은 206명이었다. 그러나 반나절 동안의 전투로 입은 피해는 전사 36명, 부상으로 후송된 자 116명, 부상당하고도 전열에 남은 자가 26명으로 총 피해가 176명(85%)에 달하였고 온전하게 살아남은 자는 30명에 불과하였다. 훗날 미 해병들에 의해서 "스미스 능선"이라 명명된 안산에서 56고지로 이어지는 이 능선이 확보됨으로써 비로소 서울 서측방을 방어하기 위한 적의 주진지가 이 능선에 연하여 구축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또 지난 이틀간 한국 해병들이 先行한 전투의 진가가 새삼스레 인식되었다. 북한군 포로들도 이구동성으로 연희능선의 상실로 전의를 잃었다고 진술하였다.


제 2대대장 로이즈 중령의 추정에 의하면 이 능선 일대에 널린 적의 시체는 1500여구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4일 오후 로이즈 중령은 예비대인 E중대를 56고지 동쪽으로 이동시켰으나 최종 목표(북부 105고지)에 대한 공격은 다음날로 미루었다. 최종목표 공격에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이는 風山 즉 72고지(창천동 4번지, 경의선 신촌역과 신영극장 사이에 있는 언덕)에는 아직도 적이 포진하고 있어서 이 고지에 대한 공격을 이날 중에 실행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북부 105고지를 비롯하여 안산 산계의 주요능선들이 점령된 것은 25일에 이르러서였다. 한국 해병 제 1대대와 미 제 5해병연대 제2대대에 의해 연희고지 일대에서 수행된 전투는 서울 서측방에서의 전반적 돌파작전의 일부였다고 하더라도 적 방어선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정적 전투였다. 그러므로 그 主戰場으로서의 연희고지가 지니는 의의를 살려 이 전투를 "연희고지 전투"라 이름 해도 무방할 것이다. 


덧글

  • 조은성 2015/10/09 19:54 # 삭제 답글

    위치상으로 서울 방어의 최후거점이라고 볼 수도 있는 중요한 지역이죠.
    갖은 고생을 하며 점령했는데 그들앞에는 시가전이라는 또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죠.
  • 금성천 2015/10/10 11:41 #

    이오지마 전투에서 산 정상에 성조기 세운 미 해병들 중 상당수가 곧 전사했죠. 중앙청에 태극기 올린 한국 해병분대에서도 그 직후 며칠 사이 전사자가 다수 발생한 거 보면 우리가 기록상 보지 못한 중에도 서울에서 다시 동북부 외곽으로의 전투가 치열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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