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군주라고요? 조선시대

소품(小品)의 가장 큰 특징은 글쓰기의 주관성에 있다. 감성적인 글쓰기, 자기 고백적이고 감정이 듬뿍 담긴 주관적인 글이 소품의 대종을 이루었다. 자기 고백적인 산문의 출현, 이것이야말로 소품의 문학사적 기여였다. 소품을 좋아하면 자연히 성리학적 가치에서 멀어진다. 정해진 격식을 떠나 글쓴이의 눈으로 사물을 직접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가치의 다원화가 이루어진다. 중국에서 양명학파의 사상이 소품에 깊이 스며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정조는 바로 이 점을 두려워했다. 왕은 이단의 문이 한 번 열리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이라며 걱정했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백승종 p115

 

정조는 당시 지식층 일각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사회적 상상력에 강력한 제동을 걸고자 했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회적 상상력은 대안사회또는 미래 사회의 모색을 말한다. 소품에서 날개를 얻은 젊은 조선 지식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이 사회적으로 전환될까봐 정조는 전전긍긍했다. 정조가 꿈꾸는 사회는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가 아니라,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이상으로 설정한 사회였다. 만일 거기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곧 이단이요, 마땅히 금지되어야 할 일이었다. 정조는 사회적 통제를 바랐다. 그것도 현상적이기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에서, 완벽한 세뇌를 추구했다. 그가 추구한 완벽한 세뇌란 독서의 폭을 한정하고, 해석을 격식화하고, 나아가 글씨체까지도 통일하는 것이었다. 과장되게 말하면, 정조는 조지 오웰이 묘사한 빅브라더의 내면화를 꿈꾸었다고 하겠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백승종 p146-147

 

 

정조는 새로운 이념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정치 제도의 근본적인 혁신을 꾀한 적도 없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개혁군주로 높이 평가하지만, 그것은 과장된 것이다. 그의 개혁은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정조는 조선 왕조의 오랜 국시인 성리학의 함양을 부르짖었다. 왕은 이단과 잡술에서 비롯한 문화적 혼란상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성리학적 근본주의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장기간에 걸쳐 문화투쟁을 벌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도교와 불교는 물론이고 새로 도입되기 시작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정조는 화폐의 통용에 관해서도 줄곧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균역법과 같은 세제의 개혁조차도 마지못해 실행에 옮겼을 뿐, 내심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오직 주자의 사상만을 정학(正學)으로 여겼고, 양명학은 물론이고 중국에서 나온 시간 서적의 수입도 엄금했다.

 

이러한 정조의 문화투쟁은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문제라고 본 새로운 문체를 과거시험을 통해 탄압했다. 이른바 패관소품의 문체가 조금이라도 묻어있는 글이면 무조건 과거시험에서 떨어뜨렸다. 글씨가 무겁고 두껍지 않다는 인상만 주어도 무조건 낙방이었다. 그에 따라 과거에 급제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조선의 젊은 선비들은 되도록 패관소품을 멀리하게 되었다.

 

천주교와 양명학 그리고 예언사상 같은 이단 사상은 조선을 대표하는 최상층 양반들의 머리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어떤 면에서 그의 시대는 역사의 갈림길에 위치해 있었다. 북학이나 실학이라든지 천주교와 서양의 새로운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체질개선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진보의 싹을 자르고 성리학 지상주의를 표방하며 구시대의 가치를 수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야말로 정조 시대가 처한 역사적 선택이었다. 바로 그러한 기조에서 정조는 체제 수호자의 길을 걸어갔다.

 

정조 이후 조선에서는 적어도 최상층 양반 가운데서 위험한 사상에 젖은 무리가 더 이상 배출되지 않았다. 비록 그로 인해 조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체적으로 체제를 변화시킬 인재를 구하지 못했지만 정조의 교화(敎化)”는 일단 완벽하게 성공했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백승종 p346-351

 

 

천주학과 양명학은 이데올로기를 표면화시키고 있으나, 문학은 그것을 은폐할 수 있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박지원의 글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 서술 책략은 워낙 교묘하여 종종 독자를 헷갈리게 만든다. 문학은 이념을 은폐하면서 재래의 세계관에 배치되는 사유의 틀을 암암리에 유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쪽과 바깥쪽> 강명관 203-204

 

18세기, 양명학 양명좌파 고증학 천주학 소설 소품 등은 명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사유로 모두 주류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고 있었다. 정조의 말처럼 천주학은 구별 가능한 외부의 적이었으나 그 외의 것들은 더욱 위험한 내부의 적이었다. 양명학과 양명좌파는 유학이란 같은 뿌리에서 자라난 이단이었고, 고증학은 학문의 엄밀성과 경전학을 빌미로 삼아 주자학을 부정하고 해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금압했던 것은 소설과 소품이었다. 그 이유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소품 역시 양명좌파의 사유를 내장하고 이으면서 대상으로의 복귀를 통해 세계의 구체성을 검토함으로써 주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것에 예리하게 주목했다. 외면상 이념을 표방하지 않는 소품이야말로 더욱 강한 감염력으로 문인 지식인들을 주류 이데올로기로부터 이탈시킬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것도 체제 중추에 있는 경화세족이 소품 독서와 창작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니, 말해 무엇 하랴.

 

문체반정으로 어두운 감옥에 처박힌 사람은 없었다. 피를 흘린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사유와 표현에 대한 탄압이 되고 족쇄가 되었다. 박지원은 소품과 소설의 문체로 사회비평을 감행했지만, 박지원을 잇는 계승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18세기의 그 다양하고 풍성했던 새로운 사유는 이렇게 해서 주저앉고 말았다.

<안쪽과 바깥쪽> 강명관 p218



영조와 정조는 서울 노론의 군주였다. 그들은 서울 지역 노론의 분위기 속에서, 진경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들이 개혁군주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서울 남인이나 서울 노론의 생각을 실천한 것이다. 따라서 그 개혁성은 심각하게 제약되었으며, 그 안에서 근대성의 싹조차 찾기 어렵다.

<조선의 역사와 철학의 모험> 손영식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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