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혁명 -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건국 그 책 그 구절


믿음의 세계에 거짓이 많고, 의심의 세계에 진리가 많다. - 후쿠자와 유기치 <학문의 권장>

 

에도시대 일본은 도쿠가와 쇼군가와 270여 개 번으로 구성된 봉건적 막번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대 에도사회는 전란이 끝나고 평화가 이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한다.

 

하지만 지방 다이묘의 반란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시행한 대형 함선과 무기의 제조 금지 조치 등 지방통제정책으로 인해 막부 말기의 일본의 군사적인 능력은 설립 초기보다도 현저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1853년 미국의 페리 함대가 에도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일본은 아무런 군사적인 대응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에 맞서 신속하게 군사적인 대응태세를 갖추는 한편 외교협상을 통해 다음해 서양 5개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한다. 이어 1858년 미국의 요청에 따라 먼저 일미수호통상조약을 먼저 체결하고 다른 서양 4개국과도 같은 내용의 수호통상조약(안세이 5조약)을 차례로 체결한다.

 

그런데 화친조약과 달리 안세이 5조약에서 항구의 개항과, 에도 오사카 두 도시의 외국인 거주허가 등 실질적인 개방을 약속한 것이 알려지면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강했던 고메이 천황이 강경하게 반대하면서 안세이 5조약에 대한 천황의 칙허는 무산되고 만다.

 

이에 외국인을 배척하려는 양이(攘夷)세력은 천황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반막부운동에 나서고, 안세이 5조약의 상대국들은 조약의 조속한 이행을 요구하는 무력행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로써 크게 도쿠가와 쇼군가, 쇼군가 직속의 막부 관료(하타모토), 후다이 다이묘를 한 축으로 하는 구체제 수호세력과 도쿠가와 시대 내내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일본 열도 서남지역의 개혁적 다이묘, 도자마 다이묘, 후쿠이 미토의 신판 다이묘, 조적의 개혁적 공경 등 체제 변혁세력을 또 다른 한 축으로 하는 막말의 대변혁과정이 시작된다.

 

그것은 18603월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사쿠라다문밖의 사건에서 본격화하기 시작해 1867129일의 왕정복고 쿠데타, 보신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동란의 연속이었다. 막부의 정치적 탄압과 이에 반발해 일어난 테러사건들, 천황을 둘러싸고 벌어진 친막부 세력과 반막부 세력 사이의 전투들, 전국적 규모의 내란으로 발전한 제 1, 2차 조슈 정벌전쟁, 시모노세키 전쟁 등 내란과 외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났다.

 

그 동란의 과정에서 일단의 개혁적 사무라이들은 봉건 막번체제처럼 지역과 신분으로 분열된 국가시스템으로는 군사력이 월등한 서구 열강의 위협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통찰을 얻는다. 에도사회가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내우외환의 국가적 위기에 빠지자 쇼군가와 다이묘가의 봉건적 경계를 넘어 일본이라는 국가, 일본 민족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근대적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이들은 봉건 막번체제 아래에서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강렬한 민족적 정체성과 근대적 국가의식을 체득하고, 봉건 막번체제를 초월하려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자신의 공적 사명감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유신과 건국의 주체세력이다.

 

이렇게 사쓰마, 조슈 두 번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신 주체세력은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여 도쿠가와 막번체제를 해체하고 천황제 통일정부를 수립하는데 성공한다. 이어 사무라이의 사회적 자살이라고 불릴 정도로 근본적인 사회 경제적 개혁정책을 단행하고, 서구의 근대적 입헌제도를 도입하여 1889년 천황제 근대국가를 수립한다. p15-18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동아시아와 일본의 근대사와 관해 우리의 시각에서만 형성된 좁고 얕은 지식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믿음의 세계에는 거짓과 오류가 많다. 거짓과 오류가, 진실과 진리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섞여 있는 이 세계에서는, 믿음보다는 의심이라는 덕목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 근대 일본의 유신과 건국을 동아시아 국가들의 비극적인 근대사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 삼아 다시 한 번 성찰해 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역사가 오늘 우리의 눈을 가리고 미래의 무덤을 파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p27

 

 

에도시대 일본에는 단일한 통일국가라고 하는 인식도 없었다. 일본 열도는 66개주 2섬의 독립적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막부는 그중에서 가장 큰 국가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p160

 

오규 소라이는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아서 흠 하나 없는 옥과 같이 수행한다 해도 실제 국가를 다스리는 도를 모르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그런 비판을 통해 내면세계의 탐구에서 벗어나 정치세계에 고유한 공적 윤리를 세우고 나아가 유학을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정치학으로 재정립하려고 했다. 군주에게 인()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실제로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유학에서 말하는 도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더라도 기꺼이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p225-226

 

파리 코믠이 끝난 지 1년 정도 지나 일본 정부의 이와쿠라 사절단이 파리를 방문했다. 이들은 그때까지 파리 시내의 건물 곳곳에 남아있던 총탄 자국, 개선문의 파괴된 모습 등 혁명의 상처를 보면서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사상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그 뒤 일본의 입헌제도 수립과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당시 일본에는 이미 프랑스대혁명에 비판적이었던 에드먼드 바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이 번역되어 있었고, 유신정부의 지도자들도 이 책을 읽고 있었다. p406-407

 

존왕양이를 명분으로 내건 토막파도 겉으로는 계속 양이(攘夷)론을 내세웠지만 사쓰마도 조슈도 사쓰에이전쟁과 시모노세키전쟁을 치르고 난 뒤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1860년대 들어 조슈, 사쓰마 등 혁명 주체 세력이 내세웠던 양이론은 막부타도를 위한 정치적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p409

 

정한론 논쟁의 발단은 징병제에서 비롯되었다. 유신정부는 징병제를 시행함으로써 중앙상비군의 수립과 같은 군사제도의 개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반면 육해군의 수뇌부는 사쓰마, 조슈, 도사 등 3번을 중심으로 하는 번군을 모아 근위병과 상비군을 만들고 징병제로는 대외전쟁용 예비군을 창설하려는 구상을 제시했다.

 

그런데 유신정부의 징병제 도입안에 대해서는 농민과 사족 모두 강하게 반발했다. 전쟁 경험이 전혀 없었던 농민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대외전쟁에 내보내 죽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징병제에 반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고, 사족들은 전쟁과 관련된 일은 막부시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특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을 징병 대상에 포함시킨 것에 대해 분개했다. 사족들은 전투 임무를 맡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들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란의 와중에서 사족들은 자신들만이 전쟁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실제 전쟁에서 자신들의 용맹함과 전투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한론은 이러한 상황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구 샀마 번사들은 조선과의 국교 수립을 핑계로 외교분쟁을 일으킨 뒤 군사적 충돌로 확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럽을 방문하고 있던 이와쿠라 사절단이 국내의 정한론 움직임에 놀라, 이토 히로부미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을 급히 귀국시키고, 기토 다카요시도 뒤따라 귀국하여 조정을 설득한 끝에 이 계획은 저지되어다. p508-509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근대국가 수립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역사적 성취다. 그런데 이 역사적 과업을 완수한 인물들은 모두 봉건체제에서 자란 봉건적 사무라이들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하여 봉건지배계급으로서 신분과 특권을 버리고 역사적인 격랑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이들을 새로운 국가체제를 건설하려는 혁명가로 키운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시대정신의 자각이다. 서구열강들이 군사력을 앞세워 위협하던 막부 말기의 시대정신은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지키는 것 즉 자주독립이었다. 이때 일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막번체제를 타파하고 천황제 통일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깨우쳐준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시다 쇼인이었다.

 

둘째는 민족적 정체성(민족의식, 애국심)의 체감이다. 에도시대에는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오직 가문과 주군만이 있을 뿐이었다. 1853년 이후 대외적 위협을 겪으면서 에도사회는 처음으로 단일민족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체감한다. 여기에는 18세기 후반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국학의 가르침이 많은 기여를 한다. 유학(儒學)과 국토순례도 이러한 체험과 각성에 큰 역할을 한다.

 

셋째는 공적 사명감의 체득이다. 사무라이는 원래 전투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던 집단이었지만 에도시대의 평화가 지속되면서 이들은 행정을 전담하는 관료집단으로 변신한다. 1%도 되지 않는 사무라이들이 공적 영역을 독점하면서 세습했기 때문에 전투능력보다는 행정적, 사무적인 전문지식의 철저한 습득과 엄격한 자기관리가 요구되었다.

 

혁명적 사무라이들은 도쿠가와 쇼군가는 더 이상 공의(公儀)가 아니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에 그 대안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천황 중심의 통일정부라는 새로운 공의를 찾아냈다. 혁명적 사무라이들이 도쿠가와 막번체제의 해체와 천황 중심의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자신의 공적인 사명으로 받아들이자 막부 말기 정치적 동란으로 뒤덮고 있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고 메이지 유신의 마지막 고개를 넘어갈 수 있었다. p660-663

 

일반적으로 에도 시대의 서민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학교 교육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문맹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오래 전부터 이미 테라코야 등에서 읽기, 쓰기, 산술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900년대 초에 일본의 문맹률이 거의 제로 상태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낮은 문맹률은 서구세계와 비교해도 매우 이른 시기에 달성된 것이었다. p671

 

덴포기(天保期)의 사무라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까? 우선 이전 세대의 사무라이들은 주로 주자학만을 배웠던 반면 이들은 주자학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사숙에서 유학하면서 유학, 양학, 의학, 병학, 국학은 물론이고 검술과 무예까지 포함하여 최고로 선진적인 지식을 자유롭게 흡수한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지적, 정신적 바탕을 형성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1774년 스기타 겐파쿠의 해체신서발간 이후 적어도 수십 년 동안 유학, 양학, 국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지적, 정신적 기반이 에도 사회 내부에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페리 함대의 등장이라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국가적 위기를 청년기에 맞이한다. 이후 이들은 어느 번, 어느 정파에 속해있던 상관없이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난에 찬 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의 끝자락에 태어나 그 시대 전체의 평화와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거친 역사의 풍랑을 온몸으로 헤쳐 나가야 했던 이 세대의 일생이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외세의 위협을 극복하고, 700년 동안 지속된 무사의 시대를 근대사회로 바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세대였다. p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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