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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병원선과 부산 육군병원의 차이

우리 기갑연대 제 2대대는 5월 10일 백담사 앞 972고지까지 진출했다. 이날 나는 박격포탄 파편을 등에 맞아 이용(李龍) 연대장이 헬기를 요청하여 후송해 주었다. 이 연대장은 나의 등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강 소위, 훌륭했네, 훌륭했어. 이제는 안 되겠어, 좀 쉬어야겠어.”라고 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도 울었다.   헬기로 수...

설악산 전투의 이용(李龍) 기갑연대장

(설악산에서) 연대가 철수할 때였다. 적이 3면으로 압축해와 끝내는 설악산 최고봉에 있는 큰 바위를 놓고 적과 대치했다. 적이 10여 미터 앞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보였으나 이용 연대장은 미동도 하지 않고 항공지원을 받아 끝내 격퇴했다.   또한 연대가 능선을 타고 철수할 때 부득이 1열 종대가 될 수밖에 없어 적은 이 호기를 ...

기병대장 장철부 2

50년 6월 25일 나는 2주간 계속된 야외훈련에서 찬 비를 듬뿍 맞고 감기 몸살에 걸려 40도 가까운 고열에 시달리면서 삼청동 하숙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옆방 00공대생의 동정이 심상치 않아 살펴보니 그는 학우 몇 사람과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비교적 똑똑히 들리는 이북방송은 인민군이 이남의 선제공격을 반격한다는 이유로서의 남침개시와 ...

기병대장 장철부 1

대한민국 육군에는 일개 기병대대가 기갑연대에 편성되어 있었다. 현대전에서 기병은 수색정찰을 위주로 하고 때로는 보병전투도 겸하고 있다. 50년 6월 28일 북괴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도하에 혈안이 되어있던 때다. 기병대대는 천호동에서 한남동 대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심야에 한강을 결사적으로 도하했던 적군은 기병대대의 공격으로 헤...

대구역에 집결한 기갑연대 기병대대

<한국전쟁통신>  세르주 브롱베르제  눈빛 기갑연대라 하면 괜히 마음이 짠하다. 청송 전투 후에는 말 한필도 없이, 흥남 철수 후에는 장갑차도 없이 전쟁 내내 기갑연대라는 거창한 명칭을 계속 유지해왔으니. <한국전쟁통신>에 수록되어 있는 위 사진은 기갑연대 기병대대가 대구역 앞에 집결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관측장교가 본 기갑연대장의 마지막

 이틀 전에 기갑연대 역습을 지원하기 위해 갔던 관측반이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물론 타고 갔던 차도, 장비도 모두 없이 카빈총 하나씩만 메고 부대로 돌아온 것이다. 전포대장과 지휘소대장 그리고 관측반의 통신병, 연락병 등 네 명씩과 운전병 모두 열한 명이 고스란히 살아서 부대로 돌아왔다. 무엇이 아까우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고맙다. 먼...

길에서 시간을 허비한 기갑연대 제1대대

 7월 13일 해가 떨어지자마자 온통 하늘이 새빨개지도록 적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평소 적은 여명에 공격하기 위해 밤 0시가 넘으면서 포사격을 시작한 후 새벽 3, 4시경에 공격을 개시했던 것으로 보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병사들에게 즉각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춘 후 취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사단에서는 밤 0시까지 아무런...

채병덕 참모총장과 유재흥 7사단장의 문답

 6월 26일 새벽 1시, 7사단 사령부에서는 채병덕 참모총장, 유재흥 7사단장, 이형근 2사단장, 강문봉, 이용문 대령이 모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기갑연대 제3장갑중대장 박용실 대위는 이렇게 회고했다. 주먹밥을 먹으면서 채병덕 총장이 유재흥 사단장에게 “적이 의정부를 빼았으면 문산 방면으로 빠질 염려가 없을까? 개성으로 남...

부하들의 선후임 연대장 평가

 연대 지휘소라 하면 연대장과 이를 수행하는 통신병 2~3명, 경호 겸 연락병 1명, 작전주임 외 2~3명, 정보주임 외 2명, 미 고문관 외 수명이 전부이고 연대 본부 요원들은 후방인 차항리에 남아 있었다. 무릎 위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능선을 타고 갈 때 김형기 정보주임은 “이거 유격교육도 받지 않은 연대를 마치 소규모 유격부대처럼 돌출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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