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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사 동창회 전의회보(全宜會報) 발행인 김석원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전의회(全宜會)의 등사판 인쇄회보 기관지인 전의회보(全宜會報) 발행인은 1917년까지는 홍사익, 18년이 이응준, 20년에 다시 홍사익으로 돌아가 22년까지 계속되고 다음이 김석원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곳에 때때로 보이는 것이 김광서, 지청천(본명 大亨) 양 사람의 가족 소식과 회비로부터 양 가족에게 보...

인민군들아. 손들고 나와라

사단은 흥해지구 전투를 치르다 포항까지 밀려 이 지역을 최후의 방어거점으로 계획하고 포항 외곽도로와 적의 접근이 예상되는 고지마다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적군과 고지를 사이에 두고 대치상태에 있을 때 사단장이 최전방 고지를 시찰하다가 병사들 앞에서 적병을 향하여 육성으로 "인민군들아! 손들고 나와서 투항하라!"고 능청스럽게 고함치...

김석원과 이종찬

우리는 배밭에서 나와 뒷산 기슭에 정렬하여 사단장님들의 훈시를 들었다. 해질녘이었다. 떠나는 김석원 사단장이 신임 이종찬 사단장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김석원 장군은 우리 중학생 시절 일본의 일선 대대장으로 용명을 떨쳐 신문에도 크게 난 맹장이었다. 카이젤 수염과 쩌렁쩌렁한 음성에 과연 힘과 위엄이 넘쳐 있었다. 우리들도 덩달아 몸에 힘이 솟는...

김석원이 여기 있다

18시경 작전명령 수행 차 사단 전방지휘소에 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송악산(오근장 북쪽)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장소였으며 송악산은 적이 점령하고 있었다. 군도를 쥔 부관을 대동하고 콧수염을 기른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다음 사단 작전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적에게 노출되었는지 수발의 포탄이 날아 왔다.  명령 수행 차 와 있던 장교들은 ...

독립지사 이종혁

이종혁은 충청도 태생으로 이충무공의 피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십대에 대한제국의 군관학교에 들어갔다가 일본 육군유년학교로 넘어간 몇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몇 사람 가운데는 이응준, 김석원등이 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뒤 일군 소위로 임관되어 인천에 귀국의 첫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그리 길지 않은 생애에 색채어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

신성모 국방장관의 50년 7월 6일 보고서

 신성모 국방장관의 50년 7월 6일 제 7차 보고 어제 오전 5시부터 오산 방면에서 미군이 적과 충돌했습니다. 어제 종일 비가 많이 와 큰 충돌은 없었으나 오늘 아침부터는 미군부대와 적의 주력부대간 전투를 벌인 결과 적의 전진을 막지 못해 후퇴하는 중입니다. 미군의 대포와 각종 무기로도 전진하는 적을 막지 못했습니다. 비로소 놀란 듯 크게 긴...

인수인계 없이 떠난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용장이었다. 그는 부대를 철저한 작전에 따라 이동시켜 낙오자가 발생하지 않게 했다. 김장군의 사단 지휘는 전 부대원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분 덕에 나는 용장 밑에 약졸이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김장군의 후임으로 사단장으로 부임한 B장군은 역대 사단장 중에서 그 지휘능력과 신망을 받지 못한 인물 중 하나...

1949년 6월 육본에서의 38선 분쟁 대응방침 논쟁

 육군본부는 옹진 사건의 종결처리를 겸해서 앞으로의 분쟁 처리방침을 협의했다. 49년 6월 하순 이응준, 김석원, 유승렬 장군 등 육군의 원로와 사단장급을 집합시켜 회의를 개최했었다. 이때 두가지 논으로 나누어졌다. 적극반응파와 절도 있는 반응파였다. 적극반응이라 함은 경찰비례의 원칙과 흡사한 것으로 상대방의 침범도수에 따라 그것을 상회하는 보...

수도사단의 미호천 전투

  제 1연대는 진천 전투 후 오근장에서 제 9연대를 흡수하여 재편성되었는데 대체로 제 1연대 병력은 제 1대대로, 제 9연대 병력은 제 2대대로 그리고 나머지 양 연대의 병력을 규합하여 제 3대대로 편성하고 연대장은 제 1연대장이었던 이희권 중령이 그대로 머물었다.  미호천은 청주 북쪽 7Km에서 동서로 흐르는 금강의 지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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